"동원체제 정당화와 기억의 정치"

[박영자의 북쪽이야기](6) - 분단 60년, 전쟁이 북한체제 지속에 미친 영향

분단 60년, 우리역사와 기억에 가장 깊게 자리 잡은 한국전쟁

올해는 해방 60년이며 동시에 분단 60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한반도의 해방과 분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질서를 그대로 투영하였다. 그러나 20세기말 세계적인 탈냉전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위협과 안보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북한의 경제․군사적 능력이 남한에 비해 뒤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우리 국민들은 왜 아직도 안보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가?

한편 북한은 사회주의권의 개혁․개방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체제전환, 1994년 김일성 사망 등으로 대내외적 체제불안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연속된 자연재해와 생산력 약화로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으며, 경제위기와 식량난으로 각종 사회일탈 현상이 나타났다. 북한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시장을 형성하고 목숨을 걸고 탈북 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정권은 1998년 공식적인 김정일체제 구축 이후, 체제유지의 마지막 보루인 군대와 군인정신으로 체제를 재정비하고 있다. ‘선군정치’ 즉 군을 앞세운 체제안정화로 강성대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와 2003년 종합시장제도를 발표하며 농민시장이나 암시장 등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질서를 합법화하였다. 북한주민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 실리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이 공식입장이며, 실질적으론 사회주의 국가가 가장 중시했던 공적 부조인 주민생존 책임을 포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탈북자조사와 증언을 통해 볼 때 상당수 북한주민들은 여전히 먹는 문제만 해결되면 북한사회에서 살기를 원하고, 김일성에 대한 향수와 김정일에 대한 충성, 그리고 강성대국 건설의지를 보여주곤 한다.

경제위기 수준이 국가체제 유지를 힘겹게 하고 주민동원과 통제가 지속되는 북한사회에서 왜 두드러진 봉기와 저항이 드러나지 않는가?

배급제가 그 의미를 상실하고 국가가 국민의 생존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왜 북한주민은 1인 지배체제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를 보여주고 있는가?

생존자체가 불안한 상황에서도 왜 북한주민들은 전쟁위협과 안보불안을 더 크게 느끼며 내핍을 감내하고 있는가?

외부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도 지속되는 ‘臣民形 社會’, 이것이 아직도 북한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주요 요인이라면 도대체 이러한 특징은 어떠한 역사적 기점을 통해 형성되었는가?

필자는 분단 60년 한반도 역사를 돌아보며, 남북한 국민들의 의식에 가장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전쟁위협과 안보불안감의 근원지가 한국전쟁임을 주목한다. 특히 대내외적 절대위기 상황에서도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의 ‘신민형 사회(臣民型 社會)’가 형성되기 시작한 역사적 기점이 바로 한국전쟁이었음을 중시한다.

해방 60년 한반도 역사 중 한국전쟁은 남북한 국민에게 가장 깊게 자리잡은 집단기억의 근원이다. 그리고 시기와 상황에 따라 수위와 폭에 변화는 있었지만 전쟁 중 발생한 사회구성원간 이념대립과 갈등, 남한의 반공의식과 북한의 전시체제화, 남북한 정권의 통일의지와 갈등 등이 아직까지 남북한 사회에서 반복․재생산되고 있다.

북한의 ‘君主-臣民’ 질서 형성 : 인격화된 민족체인 절대지도자와 충성

한국전쟁시기 북한정권의 민족이데올로기는 거대한 인민동원과 동의의 기제가 되었다. 당시 민족주의가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이유는 푸코(M. Foucault)가 지적하였듯이 같은 공간과 언어, 그리고 풍습과 법 등을 공유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즉, “단순히 개인들이 합쳐 구성된 집단이 아니라, 집단 구성원 각자가 살아 있는 육체적 실체인 왕과 법률적이며 동시에 물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민족”이 된 것이다. 구성원들 각자와 인격적이고 법률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절대 지도자의 육체, 그것이 바로 “민족의 몸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지도자의 인격 안에 존재하게 된다.(각주1)

이러한 ‘인격화된 민족’인 ‘절대지도자’가 형성된다면 그 사회는 절대지도자를 중심으로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질서의식이 형성된다. 이때 형성된 절대지도자는 권력집단에 의해 조작되어 대중에게 부과된 하나의 신화이다.(각주2)

북한에서 이 신화는 광복 직후부터 구성되었다. 일제시대 소문으로 들었던 ‘용맹한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이 아니라, 북한인민의 절대지도자로서 김일성 신화가 해방이후 정치권력에 의해 구성되었다. 이에 대해 커밍스(B. Commings)는 1945년 10월 21일자 『평양민보』에 실린 김일성에 대한 기사를 개인숭배의 단초라고 주장한다.(각주3) 한편 박명림은 김일성 신화의 출발은 한설야가 김일성의 항일투쟁지역을 직접 답사하여 기록하였다는 전기『영웅 김일성장군』이라고 한다.(각주4) 북한의 여러 문헌을 보아도 김일성 신화는 해방이후부터 시작되었으나, 유일하고 절대적인 지도자라는 신화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전면화되었다.

그러나 충성은 권력층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 현실화되는 것이다. 마사오는 일본의 파시즘을 연구하면서, 천황제가 대중동원을 가능하게 했던 이유는 정치세력의 권력장악 방식이나 과정보다 일본인의 내면적인 왜곡된 심리구조에 있다고 주장한다.(각주5) 이 왜곡된 심리구조는 한 사회의 역사적 전통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시점에서 권력집단에 의해 조작되어 대중에게 전이된 것이다. 역사적 시점 중 일반대중에서 크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은 전쟁이며, 전쟁의 위기와 고통, 그리고 권력에 의해 조작된 복종심은 쉽게 대중에게 전이되어 충성심으로 전환되곤 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한국전쟁을 보면, 북한주민들은 유엔군과 국군에 의한 폭격과 포격에 의한 피해와 학살, 점령지에서 벌어진 만행과 학살을 경험하며 원시적인 증오와 복수심을 가졌고, 이 감정이 운명공동체로 간주되는 가족과 민족 구조와 연계되어 혈족적이며 집단적인 복수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권력은 이와 같은 원시적이고 혈족적인 복수심을 공적 사유로 재구성하여, ‘나≤가족≤민족’의 복수를 실현할 신화화된 절대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으로 전이시킨 것이다.

집단적 상처가 집단적 복수의식을 형성하였으며, 집단적 복수의식이 인격화된 민족체로서 김일성 권력을 강화시켰다. 이것이 북한에서 1인 지배체제가 아래로부터의 동의를 확보할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이다. 그리하여 “조국해방전쟁의 1년 2개월 여에 걸친 경험과 교훈은 원쑤에게 굴복하지 말며 락심하지 말며 원쑤들에 대하여서는 완전히 복수할 것”을 결의하게 했고,(각주6) 대중들은 각종 모임이나 결의대회를 통해 “우리 민족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장군에게 드리는 멧세지를 채택” 했다.(각주7)

따라서 전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절대지도자의 탄생보다 신민(臣民)의 제조이다. 즉 절대지도자와 인격적 위계관계를 가지는 주체의 형성이다. 이러한 주체는 사회․문화․정치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복종의 강화와 충성의 맹세가 조작되면서 구성되고 강화된다.(각주8) 이러한 ‘군주(君主)-신민(臣民) 관계’ 형성과정에서 김일성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애국적 충성”을 요구했고,(각주9) 선동자들은 “김일성장군이 가리키는 길로…한사람같이 참가하여 빛나는 최후승리를 향해 더욱 용감히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였다.(각주10) 그리고 이러한 충성심을 구현했다는 영웅을 탄생시키면서 전파했다.

전체적으로 북한정권은 신민(臣民)의 형성과 충성심 강화를 위해 다음과 같은 정책을 실시했다. ① 인민군 가족․애국열사 유가족․영웅 가족에 대한 지원과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켜주었고, ② 피점령시 학살당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집단적 복수심으로 재구성하였으며, ③ 모든 전쟁 영웅들의 죽음 직전에는 ‘김일성장군만세’가 있었음을 선전하였고, ④ 집단적 목표와 행동을 조직하게 했다. 특히 일상적 토론과 발표는 권력의 목표 달성에 기여했다. 이것이 북한정권이 수많은 토론회․회상기 모임 등을 통해 집단의식과 행동을 조직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⑤ 공격대상을 비인간화하는 상징화 작업을 했다. 즉 집단적 복수심을 통해 ‘정의를 위하여 없어져야 할 그 무엇’으로 공격대상을 비인간화하였다. 공격대상에 대한 비인간화는 복수심을 가져야 하는 개인의 도덕적 갈등을 제거한다.(각주11)⑥ 영웅 탄생과 전파이다. 전쟁과 전사자의 도덕성과 무관하게 국가와 사회는 국가의 깃발을 들고 전쟁터에서 죽은 모든 이들을 영웅시하며 기념하고 추모한다. 이러한 의식(儀式)은 통치세력의 모든 행동에 대한 면죄부 역할을 하며, 권력의 명령에 의해 자행되어진 비이성적 행위와 만행 등에 대한 정당화에 활용된다. 이 과정을 통해 통치세력은 전쟁과 동원체제를 정당화한다.(각주12)

한국전쟁 시기 북한에서 배출된 수훈자의 종류와 숫자는 <표1>과 같다.



이 중 여성만도 공화국 영웅 9명과 각종 훈장 및 메달 수훈자 1만 4천여 명이 배출되었다.(각주13) ‘군주-신민'질서가 형성되면서 전쟁말기 “조선 인민의 영광스러운 수령이시며 항일 빨치산 투쟁의 전설적 영웅이시며 영웅적 우리 인민군의 조직자이시며 그의 탁월한 영장이신 김일성 원수 만세!”가 대중적으로 외쳐졌다.(각주14)

그리고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30일자 『로동신문』1면 헤드라인에는 “수령의 이름과 함께 우리는 위대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수령의 이름은 조선 인민의 승리의 상징이다”라는 구호와 함께 “수령에게 전 인민적 영예와 축하를 드린다”라는 사설이 실리었다. 주요 내용은 “우리의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와 더불어 나아가는 길, 그 길은 언제나 승리의 길이며 영광에 가득 찬 길이다. 우리는 이 길에서 쟁취 못할 요새가 없으며 어떠한 난관과 험로가 있더라도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전쟁을 통해 증명되었다는 것이다.(각주15)

이렇듯 북한정권은 한국전쟁을 승리로 조작하며 승리의 요인으로 ‘김일성의 위대성’을 선전하였다.(각주16) 그리하여 각종 전쟁승리 군중대회에서 시종일관 김일성에 대한 감사와 축하, 그리고 충성의 맹세가 연출되었다. 또한 각 개인들은 “수령에 대한 충성심으로 전후 복구에 매진할 것”을 요구받았다.(각주17)

정치권력의 전쟁역사 이용 : 동원체제 정당화와 기억의 정치

한국전쟁은 광복 60년 한반도 역사 중 남북한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사이다. 남북한 공히 한국전쟁의 경험은 민주주의 유예 및 국민통제, 그리고 대중참여 억압의 근거가 되었다. 또한 국민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자 하는 정권에 의해 가장 강력한 자원으로 활용된 사건사이다. 그리고 반대세력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억압 기제였다.(각주18)

특히 국가가 국민의 생존을 책임지지 못하고 동원과 억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두드러진 저항이나 봉기가 드러나지 않는 북한사회, 그리고 1인 지배체제가 지속되며 군대와 군사정신으로 집단적 군사주의를 강화하는 북한의 정치문화가 2005년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는 역사적 근원도 한국전쟁의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대내외적 위기 상황에서도 체제가 지속될 수 있는 정치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북한사회의 특수성을 한국전쟁시기 형성되기 시작한 북한의 ‘신민형 사회’에서 찾았다. 피점령 시기를 경과한 김일성 주도의 노동당 정권은 권력층 내부의 저항세력을 문책과 숙청으로 제거하며 상층 권력내부의 ‘신민형 사회’ 틀을 형성했다.

그리고 광범위한 동원과 인민재판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신민형 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아래로부터의 ‘신민형 사회’ 형성 과정에는 사회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저항 또는 반대세력의 월남이 큰 변수로 작용하였다.

또한 북한정권은 인민들의 상처와 고통을 집단적인 복수심으로 재구성하였고, 김일성을 집단적 복수를 실현시킬 ‘인격화된 민족체’로 신화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君主-臣民’ 질서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위계적 질서는 이후 북한에서 ‘신민형 사회’가 수립되는 정치문화가 제도화되게 하였다.

[각주]
1 미셸 푸코 저․박정자 역,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서울: 동문선, 1997), p. 253.
2 마루야마 마사오 저․김석근 역,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서울: 한길사, 1997).
3 당시 그 기사는 김일성과 그 가족의 업적, 그의 뛰어난 자질들을 칭찬일색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 저․김주환 역, 『한국전쟁의 기원』上, p. 276.
4 이 전기는 1946년 말 또는 47년 초 북한에서 나와 1947년 부산에서 출간되었다고 한다. 박명림,『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Ⅱ: 원인과 기원』, p. 759.
5 마루야마 마사오 저․김석근 역,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p. 51.
6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조선녀성들의 애국적 투쟁,”『로동신문』, 1951. 8. 27.
7 “황해도 녀성열성자회의 개최,”『로동신문』, 1951. 9. 19.
8 Herbert Hirsh, “Genocide and the Political of Memory: Studying Death to Preserve Life," (Chapel Hill & Lonon: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5), p. 131.
9 김일성, “전체 조선인민들에게 호소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김일성장군의 방송연설,”『조선녀성』1950년 7월호, p. 5.
10 “복권을 구매함으로써 우리의 무궁무진한 력량을 시위하자,”『로동신문』, 1951. 10. 6.
11 히르쉬는 복종과 충성은 세 가지 조건에 의해 대중동원을 가능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첫째, 목표집단을 비인간화하는 것이다. 즉 범죄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둘째, 심리적 조건이다. 권위에 대한 개인의 복종이다. 셋째, 정치적 조건으로 파괴 행위에 대한 정당화 과정이다. Herbert Hirsh, op. cit., p. 132.
12 전후 지배세력이 권력을 공고히 하는 과정은 각종 전쟁기념 행사와 전사자에 대한 영웅화․기념․추모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서울: 돌베게, 2003), pp. 106-107.
13「1953년 3․8국제 부녀절 평양시 경축 대회에서 진술한 여맹위원장 박정애의 보고」『로동신문』1953년 3월 13일.
14 “조선로동당 중앙 위원회 비서이며 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박정애의 보고,”『로동신문』1953. 3. 13.
15 “수령에게 전 인민적 영예와 축하를 드린다,”『로동신문』, 1953. 7. 30.
16 구체적으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조국해방전쟁의 준엄한 나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선과 후방의 중하와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한 몸에 지니시고 겹쌓인 난관과 시련을 헤치시면서 우리 당과 국가, 군대와 인민을 빛나는 승리에로 현명하게 이끄시였다”며, 김일성의 위대함이 전쟁승리의 결정요인이라고 선전하였다. 박태호,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사 3』, p. 351.
17 “수령이 부르는 길로!,”『로동신문』, 1953. 7. 31.
18 박명림, “분단질서의 구조와 변화: 적대와 의존의 대쌍관계 동학, 1945~1995,"『국가전략』3권 1호(1997), p.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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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읽었습니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분석 좋네요. 근데 각주 2와 5에는 마루야마 마사오라 되있는데 본문에는 그냥 마사오라 되있어요. 각주 보기 전에 본문만 보고는 약간 어리둥절 했었답니다.

  • 참생

    글 좋습니다..구체적이고..

  • 미천한놈

    집단적 복수의식의 충성심으로의 전이, 신민의식을 강조하는데, 일면 동의하나 세계제일국가 미국과 전면적으로 노출된 북한으로서는 수세적 저항의 일형태라고 볼수있지 않을까?

  • 범사마

    외려 이런 북한체제 분석을 통해 미국중심의 전후 동아시아 질서(=반공-자본주의체제)의 해악이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고 보는데여.. 동시에 비록 의도하지 않은 결과일지언정, 북조선 또한 '반미제'란 명분으로 이 질서에 편승/기생하면서 북한인민들을 수령체제의 시다바리로 전락시켜왔다는 점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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