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차도살인(借刀殺人)의 계책

[진보논평] 줄줄이 비엔나 식 순차적 구조조정 감행될 것

진보전략회의(준)는 한국사회 주요 전략아젠다에 대한 진보적 정책생산을 목표로 모인 연구자, 활동가들의 전략네트워크이다. 사회운동의 통합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운동과 운동을 이어주고 지역, 부문, 현장에서 운동기획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표방하고 있다. 진보전략회의(준) 회원들이 주요한 사안에 대해 발표하는 '진보논평'을 민중언론참세상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차도살인. 줄행랑으로 유명한 36계책 중 3번째 계책으로 ‘남의 칼을 빌어 상대를 친다’는 계책이다. 쉽게 말해 손안대고 코푸는 계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계책에서 중요한 것은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에 있다. 목표는 상대를 치는 것인데, 그 방법이 다름 아닌 남의 칼을 빌리는 것(=차도)이다. 확언하건데, FTA는 차도살인의 계책이다.


노무현 정부는 매판정권?

일부에서는 미국의 강요에 의해 한미FTA가 체결되었다거나 이번 한미FTA 타결은 미국에 비해 손해가 많이 나는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협정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한가? 이번 협정은 처음부터 노무현 정부의 의지에 의해서 추진되었고 협정을 타결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협상의 지렛대로 써야할 주요의제들을 4대 선결과제 형태로 먼저 들어주면서 협상의 개시선언을 이끌었고 미 의회의 일정에 맞춰 협상시한이 고무줄처럼 왔다갔다하는데도 협상타결에 목을 매었다. 이런 노무현 정부를 두고 미국의 강요에 의해 체결되었다는 주장은 형용모순에 가깝다.

또한 현재 한미FTA에 대한 분석은 개방에 따른 산업별 영향과 피해정도를 예측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대다수 영역에서 미국과의 시장개방에 따라 산업별로 피해는 매우 높고 긍정적 효과는 별로 없다는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진보진영의 분석도 이와 다르지 않고 여론조사 결과도 이와 비슷하게 나온다. 결국, 정부가 미국에 이익에 부합하는 한미FTA를 체결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은 매판 정권이란 말인가? 대통령 노무현은 한미FTA 체결 직후 대국민 담화에서도 이를 직접 언급하며 결코 매판정권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이 말의 진정성을 믿는다. 그런데, 매판정권이 아니라면 한미FTA는 한국 국민에게도 이익이 되는 협상이라는 것이다. 과연, 어떤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가?


구조조정 촉진 수단으로서 한미FTA

한미FTA는 협정문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현재 드러나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교역규모를 가질 전망이다. 상품의 94%가 3년 이내에 관세가 철폐된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량적인 문제가 아니다. 단기간에 관세가 없어지는 품목들은 관세철폐가 되어도 효과가 그다지 크지 않고, 민감품목들은 개방일정이 상호 20년에서 짧게는 5년까지 잡혀있다. 이것의 의미는 한미FTA에 따른 개방의 효과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짧게는 5년 길게는 20년 후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미FTA는 당장 우리 경제와 사회, 문화,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바로 한미FTA ‘효과’때문이다.

한미FTA는 개방에 따른 교역량과 교역구조의 변화와 함께 이른바 경쟁력 강화를 빌미로 한 국내 산업별 조정, 노동시장 유연화와 구조조정에 맞춰져 있다. 이런 의도는 정부도 숨기지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은 담화문을 통해 “돼지고기는 최장 10년, 닭고기는 10년 이상, 쇠고기는 15년, 사과와 배는 20년, 오렌지는 7년에 걸쳐서 관세를 철폐 또는 인하하기로 함으로써 구조조정과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실업이 생길 경우 일반적인 실업과는 별도로, 실업급여, 전업교육, 고용지원 등에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여 FTA로 인해 국민들의 생활이 불안해지는 일은 없도록 제도화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즉, 관세철폐의 시기를 잡았으니 이 일정에 맞춰 국내 산업을 재편하고 구조조정을 감행하라는 것이다. 재벌도 마찬가지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4월 5일 “한미 FTA 협상 타결과 한국 경제의 미래”라는 연구보고서 발표하면서, 한미FTA의 전략적 활용의 최우선으로 꼽은 것이 ‘경쟁에 의한 구조조정의 촉진’이며, 두 번째가 ‘국내기업들의 규제개선’이다.

따라서 이번 협상은 미국에 이익에 부합하는 협상이 본질이 아니라 국내 자본의 이해에 가장 충실하게 부합하는 협상이다. 한미FTA에 따른 산업별 (피해)분석은 그 자체로 의미 있지만 이런 이유로 산업보호론으로 빠지는 것은 FTA의 본질을 이해 못하는 것이며, 적절한 대응을 어렵게 만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부와 자본은 ‘개국 VS 쇄국’이라는 논쟁구도로 몰아가며 FTA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돌아보아야 할 것은 FTA가 노리는 진정한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FTA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가령,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되지 않았다면 멕시코 경제가 더 좋아졌을까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멕시코 정부와 자본이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을 추진하는 한 멕시코 경제는 NAFTA를 체결하지 않았어도 공공부문의 민영화와 노동시장 유연화, 개방경제를 추구하면서 오늘과 같은 상태로 돌입했을 것이다. 결국, 지금 현재 어느 나라에서도 FTA는 목표가 아닌 수단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FTA를 빌미로 자국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과 유연화를 감행하고 있다.

관세철폐와 개방에 따른 문제는 장기적인 반면, 오히려 이를 빌미로 한 구조조정은 현재적이고 그 효과는 즉시 발생한다. 한미FTA는 협상의 결과보다도 그 효과로 인해 산업전반에 구조개편과 구조조정의 소용돌이를 발생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FTA가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규제철폐 ; 글로벌 표준과 미국식 법제도의 수용

한미FTA의 또 다른 문제는 미국식 글로벌 표준의 도입에 있다. 이번 협정에 따라 국내법 개정과 미국식으로의 제도변화가 동반되는 협상내용이 상당수 있다. 대표적으로 저작권과 의약품과 관련해서는 미국식으로의 법률개편이 필수적이고 법률과 회계시장의 개방에 따라 미국이 요구하는 제도로 바꿔 나가야 할 판이다.
뿐만 아니라 문제가 된 투자자-국가 소송제도 외에도 동의명령제, 공중의견제출제도, 대중참여제 등 미국에만 있는 제도들이 담겨 있다. 이 중 몇몇 제도들은 언뜻 보기에 선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동의명령제는 기업의 공정거래법 위반 사항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제도이고, 공중의견제출제도와 대중참여제도는 노동과 환경문제에 대해 시민단체나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의견을 제출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이 제도들은 사법권을 무력화 시킬 수 있고 무엇보다도 노동권과 환경권을 지키기 위한 제도라기보다는 추가개방을 요구하는 미국의 지렛대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도 미국의 강요에 의해 강제로 도입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표방하며 도입되는 이런 미국식 법제개편은 사실상 국내자본의 요구에 의해 추진되던 것을 한미FTA체결을 빌미로 국내 저항을 무마시키거나 합의된 시기를 일부 앞당긴 것에 불과하다. 당초 동의명령제는 재정경제부와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동의명령제 도입을 시도했으나 법무부의 반발로 보류했었다. 노동부와 환경부에서도 공중의견제출제나 대중참여제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었다. 하지만 통상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경제 관료들이 한미 FTA 협상을 이용, 국내 반발을 잠재웠다. 또한, 자동차 세제의 경우 이미 2005년 5월 규제개혁장관회의에서 중장기적으로 자동차 세제를 간소화하기로 결정한 바 있고 한미FTA는 그 빌미를 제공한 것뿐이다. 평균배출량 제도도 2010년에 도입할 예정이었던 것을 2009년부터 실시하는 것으로 앞당겨졌고 기준을 조금 완화했다.(국정브리핑 4월10일자 [한미FTA-제도 선진화 ‘선순환 효과’])

이처럼 한미FTA는 국내외의 반발로 미루어 왔던 각종 규제과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로의 제도개선을 위해 한미FTA라는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따라서 한미FTA는 전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의 메시지를 띠고 있으며, 자본 자유화를 위한 규제철폐와 한반도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미국과의 경제적 동맹을 강화함으로써 이를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자본의 전략적 수단인 것이다.


구조조정, 줄줄이 비엔나 전술의 재현

1996년 노동법 개악시도에 맞서 노동진영의 총파업이 일어났고 노동유연화를 목표로 한 노동법 개악은 무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였고 직후 전산업에 걸쳐 구조조정이 감행되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빌미로 한 구조조정은 한 순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줄줄이 비엔나 쏘시지처럼 금융-제조업-공공부문 순으로 부문별, 순차적으로 하나씩 진행되어 산업 전체로 확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노동진영은 전체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고 산업별로 고립적인 대응을 하면서 하나씩 깨져 나갔다. 결국 전산업에서 지속적인 양보교섭이 이루어졌고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노동유연화는 일상이 되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런 외환위기가 FTA로 바뀌었다.

FTA라는 칼뿐 아니라, 자본시장통합법, 공공서비스 종합대책, 경제특구를 통한 교육, 의료시장의 개방, 사유화 등 이른바 자발적 자유화조치도 한국 자본의 이해와 활로를 찾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목표는 바로 지속적인 구조조정과 노동권의 축소에 있다. 이제 확대되는 FTA 속에서 산업 전반에 대한 구조조정 요구가 순차적으로 개시될 전망이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에 공공부문의 개방은 제외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물론 공공서비스 종합대책에서 밝힌 민영화와 그에 따른 매각계획도 존재하지만, 한-EU FTA는 공공부문을 주요 협상의제로 다루게 될 전망이다. 한-일 FTA는 철강과 자동차 등 제조업에 맞춰져 있고, 한-중 FTA는 한미FTA에서 드러난 농업의 구조조정을 촉진함과 동시에 농산물 수급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으며, 한-ASEAN FTA는 동아시아 시장과 개성공단 원산지 확산이라는 전략적 선택 속에서 이루어 질 전망이다. 이에 따라 각국별 FTA에 따라 각산업별 구조조정 압박은 더욱 거세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번 한미FTA에서 빠진 영역이나 미진한 영역도 이후 각국별 FTA 체결에 따라 구조조정과 개방을 강요할 것이다. 때문에 한미FTA만 놓고 산업별 피해대책을 따지는 일은 무망한 일이다. 또한, 한미FTA는 안되고, 한중FTA는 되고 하는 식의 선별적 FTA 도입도 비현실적인 얘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각국별 FTA 대응도 한-EU는 공공부문이, 한-일은 제조업이, 한-중은 농업부문이 하는 식으로 따로따로 대응할 일이 아니다.

지금 한국사회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외환위기에 이어 FTA에 대해서도 10년 전의 오류를 그대로 반복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진실이 항상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쓰라린 교훈을 또 얻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97년으로도 충분했다.
덧붙이는 말

홍석만님은 진보전략회의(준)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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