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꽤 인기가 좋습니다. 언뜻 들으면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체게바라가 그려진 옷을 입고 체게바라를 좋아한다면서 사담 후세인도 좋다고 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이집트․요르단․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등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친미국가이고, 이들 국가의 권력자들은 말만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칠 뿐 실제로는 자신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아랍의 단결’은 그야말로 말뿐입니다.
▲ 팔레스타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담 후세인 사진 |
그런데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한 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고 그 때 이라크가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날렸습니다. 이스라엘은 곧바로 이라크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미국이 말렸습니다. 이스라엘까지 전쟁에 끼어들면 아랍인들이 크게 반발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라파트와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가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고 나섰고 아랍국가들은 아라파트와 PLO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 버렸습니다. 또 쿠웨이트에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났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이 시골 마을에도 그 때 쿠웨이트에서 일하다 쫓겨 온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아랍인과 쿠르드인들을 죽이고 억압했던 사담 후세인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고,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처형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이 반발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고립된 채 늘 이스라엘에게 두들겨 맞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몇 푼의 돈과 말만 늘어놓는 다른 아랍 국가들에 비해 사담 후세인은 뭔가 행동으로 보여 줬던 인물인 거죠.
저는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는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이리 저리 얽혀 있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슈룩을 마주치던 때
아침에 빵이며 야채며 먹을거리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슈룩을 만났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절반만 만난 셈입니다.
▲ 옷 가게에 걸려 있는 옷들. 많은 여성이 화려한 옷 밖에 긴 외투를 걸치기 때문에 이런 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는 없습니다. |
한 30m 거리를 두고 슈룩이 걸어 왔고,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하지만 ‘헬로우’라고도, ‘살람 알레이쿰’이라고도 할 수 없이 그저 눈빛만 잠깐 주고받으며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의 곁을 스쳐야 했습니다. 슈룩은 여자이고 저는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슈룩의 집에서 마주쳤으면 인사도 하고 얘기도 했겠지만 길에서 만나다 보니 인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거지요.
반대로, 한국에서 함께 온 반다가 며칠 전에 혼자 길을 걷던 때가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 길을 가면 덜 그러는데 외국에서 온 여성이 혼자 길을 가면 꼬마부터 젊은 남자들까지 쉽게 말해 더 찝쩍거립니다. 팔레스타인 여성은 외부 남성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외부에서 온 여성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벌어지는 거지요. 남성이 짧은 팔 옷을 입는 것은 괜찮지만 여성이 짧은 팔 옷을 입는 것은 쉽게 말해 ‘어디 여자가!’라는 문화가 있는 곳입니다.
여기 데이르 알 고쏜은 팔레스타인에서도 작은 툴카렘, 그리고 툴카렘에서도 시골 마을입니다. 라말라나 예루살렘과 같은 큰 도시에 비해 여러 가지로 보수적인 문화가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학교를 가거나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 여성들은 대부분 하루 종일 집에 있습니다. 꼬마부터 할아버지까지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대부분 남성들이고, 여성들은 집안에서 지나는 우리를 보고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말을 건네는 정도입니다.
행사가 있어서 다른 마을에서 아랍계(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 여성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옷 입는 것 하나, 춤추는 것 하나까지 눈치 받고 욕먹어야 하는 것이 싫어서 이스라엘에서 사는 것도 힘들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배도 문제지만 남성의 지배가 더 문제인 셈이지요.
▲ 하얀 꽃이 피었습니다. |
길을 갈 때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말을 걸면 어떤 때는 어찌나 귀여운지 악수도 하고 잘 안 통하는 말이지만 이름도 물어보고 그럽니다. 또 어떤 때는 10~20명씩 우리를 둘러싸고 졸졸 따라오며 ‘차이나 차이나’ ‘코리아 코리아’ ‘헬로우 헬로우’를 계속할 때면 솔직히 좀 귀찮습니다. 대답하고 인사하는 것도 한 두 번이고, 하루 이틀이지 매번 그러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못 들은 척하면 옆에 바짝 붙어서 제가 어떤 느낌을 가질지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제 이름을 고래고래 부르기도 합니다.
이 동네에도 미국 등지에서 큰 돈을 벌어온 사람은 언던 위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살고 있고, 십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중동의 뙤약볕 아래서 집짓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죽을 동 살 동 치고 박으며 싸우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아랍과 유럽 등지에서 흘러 들어온 돈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곳이 팔레스타인입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을 미워하면서도 미국과 이스라엘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팔레스타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팔레스타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구요? 팔레스타인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가 아니라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람 사는 동네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야말로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거지요. 아랍의 억압적인 군인과 경찰에 비해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더 친절할 때도 있는 것이 세상살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동안 살면서 노동자든 여성이든 학생이든 그 자체로 완전히 해방된 집단도 개인도 본 적이 없습니다. 역사가 그렇고 사회가 그렇듯 모든 존재는 수많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함께 지닌 채 살아가는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팔레스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이스라엘 때문은 아니지만 또 많은 것이 이스라엘 때문에 벌어집니다. 모두 다 함께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두들겨 맞는 동안에도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남성이 여성을 차별합니다. 많은 일들이 서로 이리 저리 관계 맺고 있는 거지요.
▲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체 게바라, 헤겔, 마르크스 |
그렇다고 이런 저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다고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분명한 것은 나 자신이 자유롭고 싶다면 다른 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가 나를 존중하기를 바란다면 나 또한 다른 이를 존중해야겠지요.
팔레스타인인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이라는 외부의 적도 문제지만 팔레스타인 내부가 더 큰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계급적․성적 차별, 정치와 사회에 대한 무관심, 정부와 정당의 부패와 무능, 게으름, 무지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거지요. 당연합니다. 이스라엘도 문제지만 내부의 이런 문제를 극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스라엘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설사 해방된다고 해도 그 이후의 사회가 도대체 어떤 사회가 되겠습니까.
팔레스타인인 모두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듯 그들 모두가 투사는 아닙니다. 살아 있는 눈빛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무언가 해 보려고 애 쓰는 이들을 만나면 ‘정말 욕보는구나’ 싶다가도, 빈둥거리며 맨날 놀 궁리만 하면서 이스라엘 탓만 하는 이들을 보면 속 터집니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이 참 재미있기도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단순하고 간단하지 않고 여러 가지 모습을 함께 갖게 있으니 말입니다. 스스로 온전히 해방된 집단이나 개인이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운동이란 것이 필요한 거구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씨익 웃어도 봅니다.
연대라는 말은 다른 이를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나 자신이 해방 되는 것이고, 해방이라는 말은 다른 이로부터의 해방이자 스스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