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세상을 기다리며

[이수호의 잠행詩간](100)

더 기다려도 좋은가?
지난 일요일 교회마다 대강절 두 번째 초가 타올랐지만
누구나 크게 기대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추위가 심해져
배추밭 머리 허옇게 얼어가는 배춧잎처럼
우리들 마음도 그렇게 얼어 가고 있는데
누구를 더 기다려야 하는지
무얼 더 기대해야 하는지
어디 먼 어느 곳에서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며
그냥 통과할 지 잠깐 설지도 모를
어느 바람 부는 간이역 철길 가에
우리는 서 있다

정말 있기나 한가?
이렇게 바튼 기침을 하며
발 동동 구르며 기다릴 만한
가치는 있는가?
되묻기 전에
매서운 칼바람 몰아친다
눈을 뜰 수도 입을 열 수도 없다
몸을 낮추고 무릎을 꿇고 싶다
허리를 꺾고 고개를 숙이고 싶다
같이 싸워 온 동지들이
쓰러지고 있다
꽃잎처럼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다
눈보라 몰아쳐와 천지가 아득하다

찾아나서야 하는가?
기다리다 지쳐서가 아니라
온갖 탄압이 지겹고 무서워서가 아니라
애당초 내가 움직이지 않고
네가 오기만을 기다린
내 오판과 오류를 인정하고
내가 네게로 한 발 다가가는 것이
네가 내게로 한 발 다가오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롭게 발견할 때
나는 한 발을 뗄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아 그렇구나
내가 네게로 빨리 달려갈 때
너는 내게로 더 빨리 다가오는구나
그래서 기다림이란
어느 바람 부는 길목이나 어두운 조명 아래서
발 동동 구르며 애태우는 것이 아니라
달려가는 것이구나
눈 부릅뜨고 뛰어나가는 것이구나
너와 나의 꿈을 찾아
손잡고 함께 앞으로
힘차게 나가는 것이구나

보라
밤이 걷히고 뚜벅뚜벅
새벽이 오고 있다

* ‘참세상’을 꿈꾸며 지난 6월 1일부터 시작한 ‘잠행시간’ 연재를 100회로 마무리합니다. 나로서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시가 현장에 있어야 하고, 현장 그 자체여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 같습니다. 지면을 허락하고 매일 원고 올리는 수고를 해 주신 참세상과 형편없는 글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머리 숙여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연재한 시들을 모아 ‘사람이 사랑이다’ 시집을 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쓰는 일이 힘들지만 또 새로운 많은 분들과 만남의 기회를 마련해 주어 참 즐거웠습니다. 힘닿는 대로 계속 써보고 싶습니다. 또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모두모두 건강하시길 빕니다. (제 시나 글은 제 블로그에 올리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http://blog.daum.net/mulb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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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호 , 시 , 참세상 , 사람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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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nseksrmrqhr

    시폐時弊를 고치지 않고서는 성군의 정치도 무위에 불과하다 하십니다... 서로의 아픔을 나누지 못한 채 표류하는 위선의 행동들이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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