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뻑 내린 눈이 온 세상을 덮은 날이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일차선 도로는 이미 눈으로 곤죽이 되어 있었고 턱턱 막히는 도로 위에 눈을 뒤집어쓰고 서 있는 자동차들은 미련하게 웅크리고 있는 백곰들처럼 보였다. 주말까지 연락을 주겠다고 한 곳에선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만 날름 빼 먹고는 시치미를 떼었다. 월요일 오전이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나는 밥도 안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 책방들을 헤집고 다니며 시간을 죽였다.
그러다가 저녁때쯤에 집을 나섰다. 친구 놈에게 손전화 문자를 보냈더니 누군가와 만나 한 잔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눈이 많이 왔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좋지 않을 때마다 하는 버릇처럼 나는 동네에 있는 교보문고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찾아든 책방이었다. 아까 집에서 인터넷으로 겉쪽만 보았던 책들이 온몸 그대로 말끔한 진열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러저러한 문학상을 받았다고, 놓칠 수 없는 걸작이라고, 읽기 시작하자마자 빨려들 것이라고, 우리 시대는 이런 작품을 기다려 왔다고 하는 글귀들이 마치 싸구려 화장품처럼 치덕치덕 책들의 낯짝에 발라져 있었다. 나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그 느끼함이 싫어 얼른 시집이 꽂힌 쪽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낯익은 이름 하나를 보았다.
송경동.
아, 새 시집이 나왔구나.
그런데 출판사가 창비였다. 창비 시선 310번으로 때깔 곱게 나온 시집이었다. 문득 집회 현장에서 종종 마주치던 송경동 시인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가 집회 현장에서 애타게 부르짖으며 읽던, 장사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그의 시들이 생각났다. 꽤나 오랫동안 노동자 농민 문학에 등 돌려 온 창비가 무슨 바람이 불어 그의 시를 묶어 책으로 낼 작정을 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시집 맨 뒷장을 보니 초판 1쇄를 찍어 낸 날이 2009년 12월 30일이라 적혀 있었다.
시집 겉쪽 앞날개에는 송경동 시인의 얼굴이 박혀 있었다. 잘 지내고 계실까. 지난해 6월 용산 참사 140일 문화제 때 마주친 뒤로 만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야, 그러고 보니 집회에 나간 지도 꽤 오래 됐다.”
“그래?”
지난 세밑에 친구 놈과 송년회 삼아 만난 날이었다.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마음에 들었는지 교장 선생은 면접을 보겠다며 나를 불러냈고 나는 면접 끝나고 술이나 한 잔 먹었으면 해서 미리 친구 놈을 불러냈다. 지루하기 짝이 없던 면접을 마치고 둘이 감자탕 집에 마주 앉아 술은 안 먹고 담배만 피우며 온갖 쓸데없는 얘기들을 지껄이고 있는데, 아홉 시가 되자 텔레비전에서 용산 참사 유가족들과 정부가 합의를 보았다는 뉴스가 나왔다. 검은 옷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주저앉아 꺼이꺼이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담배 연기 속으로 송경동 시인과 박래군 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용산 현장에 가 본지도 너무나 오래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용산 말고도 다른 어느 현장에도 요새 통 안 나가.”
“그래?”
“오래 됐지.”
시집 앞날개에 박힌 얼굴은 지난해 용산 현장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지친 듯 보이면서도 왠지 듬직하고 우람해 보이는 그 얼굴은 내게 요새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고 있었다.
뭐 하고 지내요?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뒤쪽 표지를 보니 시집 값은 7천 원이었다. 나는 지갑을 꺼내 종이돈이 얼마나 있는지 헤아려 보았다.
지난해 여름부터 12월까지 하던 일을 끝내고 보니 세밑이 되자 내 손에는 달마다 들어오는 활동비 20만 원이 달랑 쥐어졌다. 반년쯤 밀린 손전화 요금을 내고 정말 사고 싶었던 것들 몇 가지를 사고 나니 얼렁뚱땅 반이 날아갔다. 새해부터는 일이 없었다. 새 일을 구할 때까지 이 돈으로 버텨야 했다.
시집을 건성건성 넘기며 훑어보았다. 집회 현장에서 송경동 시인의 목소리로 직접 들었던 시도 있었고 인터넷 어디선가에서 본 시도 있었다.
“사진 좀 많이 찍어 줘요. 글도 하나 좋은 걸로 써 주고요.”
용산 참사 140일 문화제에서 만난 송경동 시인은 웃으며 내게 말했었다. 취재를 해서 글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서 가방 속에 처박혀 있던 수첩과 볼펜을 꺼냈고 결국 다음날 짤막한 글 하나가 참세상에 올라갔다. 나는 아마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부끄럽기 이전에 화가 났을 것이다. 140일 문화제 현장 한구석에서는 소설 쓴다는 사람들과 시 쓴다는 사람들이 한 덩어리로 몰려 앉아 막걸리 잔을 돌리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이 시대 사람들과 함께 숨쉬겠다며 문학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집회 현장에 나와 무슨 선언 같은 것이나 하고, 벽에 그럴 듯한 글귀나 적고, 술추렴하며 시적인 것이 어쩌고 현실이 어쩌고 입방아나 찧는 것이 전부인지, 어쩌면 그토록 가난한 상상력을 가진 치들이 고작 글재주 하나로 대접을 받는 것인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부끄러워졌을 것이다. 문학판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네들 이름이라도 팔아먹어 세상 사람들의 눈길이 용산 현장으로 쏠리게 할 수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참세상에 짤막한 글 하나 보내는 것 말고 없었다. 글 쓴다는 사람들에게 글 쓰는 것 말고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부터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들이 어떻게 살든 무엇을 하든 내 삶부터가 일단 하루하루 알맹이가 없었고 글을 쓴다는 구실로 참으로 많은 것들을 눈감고 지나쳐 버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 부끄러움은 끊이지 않고 질기도록 이어지며 지난 세밑에 친구 놈과 마주 앉아 객쩍은 소리나 늘어놓던 감자탕 집에 이르러 마침내 서슬 푸르게 되살아났다. 나는 괜히 시무룩해져 다 식은 감자탕을 데우는 체 가스 불을 켜며 말했다.
“집에 들어가면 용산 참사 어떻게 타결 됐는지 뉴스나 찾아봐야겠다.”
“그래.”
송경동 시인과 처음 만난 건 언제였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느 집회 현장 아니면 어느 집회 뒤풀이 자리였을 것이다. <삶이 보이는 창 르포 문학 모임>이 만들어질 때 함께 했던 분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 마주하게 된 송경동 시인은 내가 내 이름을 밝히자 그 칼칼하면서도 구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병학 씨가 참세상에 올리는 글 잘 읽고 있어요. 글이 너무 좋아. 나 팬이에요.”
처음엔 도무지 무슨 소린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선 그냥 헤 웃으며 얼버무렸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 내 글을 두고 좋다고 한 것이었는데, 무얼 쓰든 얄팍하고 진부한 글만 나오는 것 같아 내 글쓰기에 침 뱉고 똥칠하기를 마다하지 않던 그 즈음 나는 송경동 시인의 칭찬이 오히려 귀엣가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송경동 시인은 비정규직 문화제에서, 기륭전자에서, 용산 참사 현장에서, 이런저런 뒤풀이 자리에서 나와 마주칠 때마다 마치 이 세상의 빛과 소금과도 같은 귀한 젊은이를 보는 듯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럴 때마다 몸 둘 바를 몰랐다. 송경동 시인이나 다른 현장 활동가들, 노조 조합원들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열심히 관찰하고 내키는 대로 쓰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내키는 대로 써내려 가는 글마다 참세상에서는 꼬박꼬박 기사로 실어 주었고 나는 글에 멋을 부리고 싶을 때마다 가끔 송경동 시인의 시를 빌려와 글 속에 끼워 넣기도 했다.
“야, 주말까지 연락을 준댔는데 내일 모레가 설날이니까 아무래도 내일 연락 주지 않을까?”
“내가 봤을 땐 너 붙을 거 같은데?”
시간이 그리 오래 흐르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느새 밥벌이 걱정 말고는 모든 걸 까맣게 잊어버린,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하지만 잊어버리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또 잊어버리는 희한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이 좆같은 사회에서 통하는 내 몸값이 자꾸만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 그런 거지.”
한 달에 20만 원씩 받으며 어딘가에서 일한다는 구실은 글을 쓴다는 구실만큼이나 컸다. 아니, 모든 구실은 다 그렇게 커다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뉴스는 점점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게 되었다. 그 많은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들과 답이 안 나오는 용산 현장은 바짝 졸아붙은 양심을 가끔씩 풀어 주어야 할 때마다 반짝 떠올렸다가 금방 잊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뱃속에 들이부었다.
다시 지갑을 들여다보았다. 시집 표지 속 멀리서 다가오는 기차의 불빛을 보았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내내 마치 나를 제발 받아 달라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그건 술자리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왜 당신네 일터에 들어가 당신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먹고살아야 하는지 딱 떨어지게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소개서였다. 그건 자기소개서가 아니라 자기판매서였고 나를 어떻게 부려먹으라고 알려주는 자기사용설명서였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나는 오래 전 세상에 떠돌았던 우스갯소리인 최불암 시리즈를 떠올리고는 했다.
<최불암 이력서>
이름 : 최불암
성별 : 최
본적 : 누굴?
호주 : 가 본 적 없음
주소 : 뭘 줘?
가족관계 : 가족과는 관계를 갖지 않음
입사 동기 : 입사를 해야 동기가 생기지!
자기소개 : 우리 자기는 무척 예쁘다.
진짜로 이력서를 이렇게 써서 보내볼까 나는 혼자 큭큭거리기도 했다. 우스갯소리 속 최불암이 30대에 억대 연봉을 받는 벤처 사업가들보다 훨씬 더 멋져 보였다. 별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써먹을 만한 기술 하나 없는 내 자신이 싫어질 때가 많았다.
책방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 시집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송경동 시인의 시집을 들고 가서 값을 치렀다. 사흘 차비, 또는 소주 여섯 병, 또는 담배 세 갑이 눈 깜짝할 새 날아갔다. 영수증과 함께 시집을 가방 속에 쑤셔 넣었다.
토요일 오후 늦게 시립도서관에 갔었다. 도서관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오늘까지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이제 그만 마음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 뭘 먹고 살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또 써야 할까. 나는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자기소개서 따위는 다시는 쓰고 싶지 않았다. 직선들과 빈칸들이 꽉 맞물려 있는 이력서는 살점 다 발라먹고 버린 생선뼈처럼 공허해 보였다. 내가 들어가고 싶은 곳도 나를 받아 줄 만한 곳도 없다면 내가 들어가고 싶은 곳과 나를 받아 줄 곳을 내가 내 힘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어쩌지? 집구석에서 소설이나 쓸까?”
“그래라.”
집에 가서 하던 일을 마저 끝내야 한다며 친구 놈은 일어섰고 나도 따라 일어섰다. 추운 바깥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감자탕 집 유리창 안을 바라보니 계산을 하는 친구 놈이 들여다보였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다가들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참 서럽게 느껴졌다.
집에 들어와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방에 들어와 시집을 펴들었다. 어려운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숱한 현장들과 숱한 얼굴들, 숱한 군홧발과 숱한 방패질, 숱한 부르짖음과 숱한 눈물을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얼굴들과 깃발들이 풍선처럼 하나 둘 둥실둥실 머릿속에서 떠올라 왔다.
시를 쓰는 법은 사실 간단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고, 느끼지 않은 것을 느꼈다고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했다고 말하지 않고, 쓰기 싫은 것을 쓰겠다고 덤비지 않으면 그것이 시다. 아예 한 글자도 쓰지 않은 빈 종이가 때로는 더 시적일 때가 있다. 가끔 대책 없이 솔직한 시와 단둘이 마주하게 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뜬금없이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어떻게 살아야 착하게 살 수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다.
일기장을 훔쳐 본 것도 같았고, 시로 쓴 르포를 읽은 것 같기도 했다. 시집을 덮고 나서 나는 방구석 책더미를 뒤져 송경동 시인의 첫 시집 <꿀잠>을 꺼냈다.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어느 책방에서 이 시집을 힘들게 찾아냈을 때 나는 땡전 한 푼 없었고 결국 시집을 외투 속에 감춰 몰래 훔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삶이 보이는 창과 송경동 시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돈이 없는데!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은 제값 주고 들고 나왔다. 다 읽고 나니 나 말고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을 읽어 주었으면 싶었고, 시집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뭔가 글이라도 하나 써서 참세상에 올리면 사람들이 밥 한 끼 굶는 셈 치고 시집을 사서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들 시집을 다 보고 나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착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서평도 아니고 독후감도 아니고 발문도 아닌 어정뜬 이 글의 종류는 저 위에 써 있는 대로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을 읽고’이다. 아무 일 없었으면 이런 글은 결코 쓰지 않았을 테지만 송경동 시인의 시집은 내게 굳이 이런 글을 쓰게 만들었다. 뭐라고 한 마디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흠뻑 내린 눈이 온 세상을 덮은 날, 나는 올 한 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것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가 들어가고 싶은 곳도 없었고 나를 받아 줄 만한 곳도 없었다. 그런데도 하릴없이 돈은 벌어야 했다. 머지않아 나는 타협을 하게 될지 모른다. 누가 또 어떤 이유로 길바닥에서 군홧발에 짓밟히든 말든 영정 사진을 끌어안고 엉엉 울든 말든 나는 ‘비정규직 철폐가’의 노랫말도 다 잊어버린 채 어디선가 비정규직으로 꾸역꾸역 돈이나 벌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 생각도 없이 가다가 어딘가에 발이 걸려 우당탕 넘어져 버렸다. 송경동 시인이 내 발을 걸었다. 내게 일자리도 주지 않는 주제에, 생활비도 주지 않는 주제에,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알려주지도 않는 주제에 송경동 시인은 내 딴죽을 걸고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요새 뭐 하고 지내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사소한 물음이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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