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재정위기의 이면: 인종주의의 대두

[투쟁하는 세계노동자](11) 그리스 반인종주의 운동

그리스 재정위기는 한국 진보진영 내 핫이슈다. 갈수록 심해지는 실업, 재정긴축정책, 그에 맞선 노동자·민중의 투쟁, 채무불이행과 유로존 이탈의 가능성 등 많은 이야기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이면에는 우리가 간과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2009년 재정위기가 본격화된 이후에 심해지는 외국인혐오증, 인종주의적 범죄와 반이주민 정책이다. 다행히 이러한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이 최근에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인종주의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에서 인종주의 대두와 그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전략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의 이주민

전체 인구가 1,130만4천 명인 그리스에서 현재 1백~ 1백3십만 명의 이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주민 인구는 주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 이후 그리스와 국경을 공유하는 알바니아를 비롯한 발칸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2000년대 초반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온 망명(난민) 신청자와 미등록이주자라는 두 그룹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이주민들은 주로 본국의 경제적·정치적 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이주를 선택한다.

그리스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럽연합으로 이동하는 경로인 터키와 국경을 공유하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국가로 이주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에 먼저 도착한다. 유럽연합 이민당국은 2010년 말 현재 유럽연합으로 들어오는 미등록 이주민 90%가 그리스를 통한다고 추정한다. 이러한 이주민 중 일부는 그리스에서 취업을 목표로 하지만 대부분은 그리스를 통해 기타 유럽국가에 이주해 난민신청을 하거나 가족과 결합하고자 한다. 그러나 난민 신청자들은 유럽연합 더블린 II 규정에 따라 유럽연합 회원국 내 최초로 도착한 나라에 머물러야 하므로, 그리스를 떠나지 못하고 아테네나 다른 대도시에서 최하층을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저임금 비정규직·비공식적 사업장(농업, 건설, 제조, 가사노동, 서비스, 노점 등)에 편입되며 여러 불안정한 체류자격(난민 신청 상태, 미등록에서 단기노동과 체류허가로 등록된 상태, 노동과 체류허가 신청한 상태, 미등록)을 지닌다.

  그리스 인종주의 반대집회

대중적 인종주의의 대두

그리스 경제위기가 발생 후 이주민에 대한 여론과 사회적 분위기는 급속하게 악화되었다. 현재 아테네에서 반이주민 낙서를 쉽게 볼 수 있으며 이주민은 일반 그리스 국민에 의한 인종주의적 공격과 희롱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고 있다. 국체인권단체 Human Rights Watch의 최근 보고서에 의하면 아테네에 위치한 비영리 의료원 두 곳의 2011년 상반기 폭력범죄 피해 이민자 치료사례는 각각 300건과 200건이다. 또한 인종주의 범죄를 조사하기 위해서 결성된 NGO네트워크는 2011년 10월~11월에 아테네와 파트라스 두 곳에서 총 63건의 비슷한 범죄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많은 이주민이 어떤 지역은 공격이 두려워 다니지 못한다고 말한다.

인종주의 범죄의 급속한 증가는 지난 몇 년 동안 ‘시민조직’으로 불리는 자발적인 동네순찰단의 결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조직들이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밤에 순찰하면서 이주민을 길거리와 공원에서 쫓아낸다. 그들은 이 활동이 긴축재정으로 인해 약화된 경찰이 못하는 역할을 채워 준다고 주장한다. 경찰들은 시민조직을 통제하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활동에 안도를 표현할 때가 많다. 그리스 활동가들은 경찰들이 실제로 시민순찰단의 활동을 지원하고 협력한다고 주장한다.

보수화되는 정치문화와 이주정책

대중적 인종주의의 강화는 전반적인 정치문화의 보수화를 동반한다. 이주정책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 5~6월에 선거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주문제는 핵심 쟁점이었다. 극우뿐 아니라 여러 주류 정당들이 미등록이주를 도시의 빈민화, 범죄와 공중위생문제의 원인으로 연결시키는 입장을 취했다. 안토니스 사마라스 신민주당 당수는 그리스의 도시를 그리스인을 위해서 되찾을 것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선거를 몇 개월 앞두고 신민주당-사회당 연정은 이주민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 조치를 취했다. 2012년 2월에는 그리스-터키 국경의 에브로스지역에 미등록 이주를 막기 위해서 12.5 킬로미터 장벽의 시공에 들어갔다. 3월 말에는 전국적으로 30개의 새로운 외국인보호소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아테네 시내에서의 단속도 강화했다. 진보세력과 일부 언론은 신민주당과 사회당이 이주문제를 강조하고 이주 통제정책을 발표한 것은 경제위기와 재정긴축정책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인종주의의 원인 1 : 비합리적인 이주정책

인종주의 심화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그리스의 비합리적인 이주정책과 경제위기의 결합이 낳은 결과다. 그리스는 미등록 이주민을 계속 유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장기적 대책 없이 합법화 프로그램, 즉 계속적인 단속과 단기적 체류 허가를 부여하는 미봉책만으로 대응해 왔다. 1998년, 2001년, 2005년, 2007년에 실시된 합법화 프로그램 하에서 이주민들은 1~3년 기간의 노동 및 체류 허가를 받게 된다. 체류허가 갱신은 공식적인 횟수 제한은 없지만, 이를 받으려면 고용주가 지급하는 사회복지 지출을 입증하는 스탬프를 제출함으로써 정규적 취업 상태를 증명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 대부분이 고용계약서와 사회복지지출이 존재하지 않는 부문(건설, 중소제조업, 비공식)에 종사하기 때문에 체류허가 갱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등록되었다가 다시 미등록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비록 정규직 고용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도 체류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고용주의 사회복지 지출 증명 스탬프가 필요하기 때문에 갱신은 고용주에게 완전히 종속된다. 더욱이 체류허가 신청이나 갱신 처리과정에 매우 긴 기간이 소요되므로, 허가가 만료되는 시점에서 새 허가를 받지 못한 이주민이 많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고 유지하는 것이 어렵고, 사회복지 스탬프로 취업상태를 증명해야 체류허가를 갱신할 수 있는 불합리한 제도와 이에 따른 사용자에 대한 종속 때문에 이주민들은 저임금에 착취하기 쉬운 불안정한 최하층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위기 하에서 더욱 불안정해지는 사회적 지위

이러한 상황은 경제위기 하에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트로이카가 강요한 긴축재정 정책으로 인해 난민 신청과 체류허가 갱신을 처리할 공무원 인원은 계속 축소되고 있다. 더구나 경제위기가 야기하는 실업은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부문에서 특히 심각하다. 2009년 이래 이주민 실업은 내국인 실업보다 더 증가했다. 지난 3년 간 등록노동자 수가 2009년 58만7천 명에서 2011년 46만7천 명으로 하락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를 떠난 등록노동자들의 숫자보다 많은 등록노동자들이 고용을 유지하지 못해 미등록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위기 전부터 내국인보다 훨씬 빈곤한 이주민 일부는 실업과 사회적 불안정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가벼운 범죄를 생존전략으로 택하게 되었고 일부는 경제위기 하에서 강화된 범죄조직들에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들은 범죄 증가와 전반적인 생활주순 하락에이라는 상황을 놓고 이주민들에게 가장 먼저 시선을 집중하게 된다.

인종주의의 원인 2 : 신나치세력의 등장

이와 같은 개인적 편견은 극우 신나치세력의 활동을 통해서 활씬 강화된다. 지난 총선에서18석을 획득한 황금새벽당과 같은 극우정당들은 지지율을 올리고 당원을 늘이기 위해 이주민 범죄를 과장하고 극단적 인종주의적 담론을 사용하면서 일반 국민의 공포를 자극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외국인혐오증은 전체 사회에 전파된다. 황금새벽당이 시민순찰단을 지원해 인종주의적 범죄를 유도하고 조직하고 직접적으로 저지름으로써 이주민을 보다 위축시키고 테러분위기를 만든다. 결국 경제위기와 사회적 혼란이라는 상황에서 극우세력들은 인종주의적 정서를 형성하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극우세력뿐 아니라 주류 정당들도 반이주민 담론을 사용하게 되고 반이주민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

그리스에서 반인종주의 운동은 1990년대부터 본격화했다. 이 운동은 이주민과 내국인 활동가의 공동 투쟁으로 이루어진다. 노조들이 이주노동자를 적극적으로 조직하지 않는 상황에서 수많은 국적별 이주민단체와 이주노동자의 조직이 결성되었다. 파키스탄공동체(Pakistan Community), 아프간공동체(Afghan Community), 통합아프리카여성조직(United African Women Organization), 필리핀노동자연대(Unity of Filipino Workers in Greece), 이민노동자노동조합 등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조직들은 그리스 좌파단체들과 함께 매년 ‘반인종주의 축제’(Antiracist Festival)를 개최하고 있다. 이주민 조직은 행사에서 부스를 차리고 전통음악을 배경으로 음식을 팔고, 그리스인들은 이 행사에 참여하여 이주민들의 문화를 접한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인과 이주민의 공존, 인종주의 없는 사회에 대한 희망과 그 가능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종주의의 정의

반인종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세력들 간에 인종주의에 대한 이해와 그에 부합하는 대응전략에 관한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운동 내 지배적 경향은 인종주의의 핵심을 대중적 외국인혐오주의로 보고 반인종주의 축제와 같은 활동을 통해서 상호간의 문화적 이해를 강화하는 것을 주 전략으로 택하고 있다. 즉, 이들은 대중의 이주민 문화에 대한 지식 부재를 대중적 인종주의의 원인으로 보고 이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종주의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국가에 원인이 있는 억압적 체계”로 보는 관점도 존재한다. 이 입장을 취하는 세력은 국가의 인종주의적 조치(racist initiatives)에 도전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종주의적 조치’란 이주정책 뿐 아니라 주류 정당의 이주민에 대한 경제위기 책임전가와 극우정당과의 협력, 그리고 경찰의 인종주의 범죄 묵인 등을 의미한다.

<인종주의 파시즘위협 반대 공동행동>의 활동

경제위기의 발발과 함께 인종주의 범죄가 급속히 증가하는 가운데 반인종주의 세력은 황금새벽당을 비롯한 극우 신나치 집단에 대응하는 것에 특별히 집중하고 있다. 2009년에는 반자본주의좌파연합(ANTARSYA, 이후 ‘안타르시아’)의 일부 세력과 일부 이주민단체 지도부를 중심으로 ‘인종주의 파시즘위협 반대공동행동’(Initiative United against Racism and the Fascist Threat (KEERFA)이라는 새로운 반인종주의 조직이 결성되었다.

대규모 집회를 통해서 황금새벽당의 폭력을 규탄하고 반대하는 것이 KEERFA의 핵심적이고 두드러진 활동이다. 이러한 집회는 동시다발로 여러 도시에서 개최되고 참가자는 보통 수천 명에 이른다. 이주민 조직의 참여가 상당히 높다. KEERFA는 또한 인종주의와 파시즘, 특히 황금새벽당에 반대하고 이를 고립시키기 위해서 노동자의 광범위한 대응전선 구축을 추진하고 있으며 시민순찰단에 대응할 지역자위위원회(neighborhood self-defense committee)를 조직하고 있다.

인종주의 대응전략 평가

극단적인 외국인혐오주의와 이주민에 대한 범죄가 현재 너무 빈번하게 심각한 형태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이주민의 신체적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대응이 시급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나치세력과 외국인혐오증에 대한 대응을 주 활동으로 설정하는 것은 국가적 인종주의를 우선적 과제로 바라보는 KEERFA의 관점에서 약간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인종주의의 원인은 “자본주의와 국가에” 있다고 보는 KEERFA의 입장에 따르면 파시즘과 인종주의 폭력을 묵인하고 유도하는 국가의 역할을 폭로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KEERFA를 주도하는 세력은 장기적으로는 국가적 인종주의를 궁극적인 투쟁 대상으로 보지만 현재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대중적 인종주의에 맞선 투쟁을 국가적 인종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경로로 보는 듯하다. 분명하게도 신나치세력, 다시 말해 대중적 외국인 혐오증은 정치문화와 이주정책의 보수화를 촉진하는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황금새벽당을 비롯한 인종주의 집단을 ‘고립’시키는 것은 이들의 대중적 기반, 따라서 정치적 영향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가장 시급한 목표로 살정하는 것은 결국 전략적인 선택인 듯하다.

한국에서도 반인종주의 운동을 강화하자

경제위기 시기에 인종주의의 강화는 결국 그리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노르웨이 등 유럽 전역에 대중적 외국인혐오증이 심해지고 극우세력이 등장하고 있으며 반이주민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다. 한국에서 유럽만큼 경제위기가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아직까지 인종주의의 심화가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이주민에 대한 범죄자 취급과 인종주의단체의 활동이 서서히 강화되고 있으며 이주민의 권리를 보다 제약하는 정책 방향이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채무위기 심화에 따른 한국 경제위기가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멀지 않은 미래에 그리스와 같은 형태가 아니더라도 한국에 인종주의는 중요한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 몇 년 간의 탄압으로 약화된 이주운동이 지금부터 준비에 들어가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다.

인종주의 대응전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리스의 반인종주의 운동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유의미한 작업이 될 수 있다. KEERFA와 같은 단위의 다차원적인 인종주의 분석을 배워 한국사회에 맞게 적용해 적합한 교육과 활동을 고민할 수 있다. 여기에서 대중적 인종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 상호간의 문화적 이해에 초점을 맞춘 행사보다는 억압체계로서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적, 제도적 관계, 대중적 정서와 정부의 담론과 이주정책의 상관관계를 드러내는 대중 교육이 중요하다. 또한 그리스 이주민조직들과의 직접적 소통을 통해서 그들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보다 자세히 파악하고 이주민 주체화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 대안세계로! 2012 노동운동포럼

일시: 8월 18일~19일(토, 일)
장소: 고려대학교 문과대 서관
문의: 010.3793.1927(사회진보연대)
참가비: 양일 1만원

강의 2: 경제위기 시대, 민족주의-인종주의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일시: 8월 19일, 9시:30~12:00
장소: 서관 215호

경제위기 하에서 그리스의 인종주의 대두와 좌파의 대응
- 임월산 (노동자운동연구소 국제국장)

한국의 대중적 인종주의 현황
- 강민석 (전국학생행진 활동가)

인종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 이주민제도에 대한 비판
- 박진우 (이주노동자노동조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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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 그리스 , 경제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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