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복지 공약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

[봉당풍경](6) 사라져 가는 사람들의 목숨 구하기

대선레이스가 펼쳐지면서 각 후보 진영에서는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아주 많은 정책보따리를 쏟아내고 있다. 그 중 다른 어느 때보다도 복지정책은 중요한 선거이슈로 부각되었고, 각 후보들의 말대로라면 당장 내년부터 복지국가가 실현될 기세다. 그러나 그렇게 넘쳐나는 복지비전 한가운데서 연일 사라지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장애아들을 둔 딸을 가엾게 여긴 70대 노인이 손자를 품고 세상을 등진 사건이 뉴스로 전파된 이후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이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치매를 앓기 시작했던 80대 노인, 남편의 사망 후 자녀와 살아오던 주부, 이혼 후 딸들과 함께 살아오다 암 진단을 받은 엄마, 노모와 함께 살다가 55만원 월세를 7개월째 못내 독촉을 받아 오던 딸... 노인은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고, 세 여성은 부양가족과 함께 동반자살을 선택했다. 그런가 하면 15만 7,740원의 전기료 채납으로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켜고 잠들었던 60대 할머니와 손자는 화마에 그들의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화재현장에서 11살 장애 남동생을 보호하다가 13살 누나가 유독가스에 중태에 빠졌다가 결국 사망하게 되었고, 이 사건 이전 중증장애인이면서 장애인권 활동가였던 김주영 씨도 화재로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불과 두 달 여 만에 벌어진 일련의 죽음들이다. 무엇이 이들을 죽음의 사지로 내 몬 걸까?

  김주영 활동가의 영정

이들은 현재 시장구조에서 보호될 수 없거나, 존재 자체를 인정받기 어려운 노인, 혼자 가족을 부양하는 여성, 그리고 장애인이다. 절절했던 죽음의 이면에는 절망보다 깊었던 빈곤과 질병 그리고 비현실적인 장애인 복지제도의 문제가 있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사회권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1948년 헌법이 제정된 이래 헌법의 가치를 실현해 가야하는 국가는 아직까지도 가난하거나, 아프거나, 장애를 가진 국민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연일 MB와 독재자의 딸은 ‘서민을 위하는’, ‘민생을 돌보는’, ‘국민의 아픔을 아는’ 등의 온갖 수사어구로 유권자를 현혹할 뿐, 현실의 참혹함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자본주의가 시작됐던 18세기 영국사회에서 심각하게 부각된 사회문제는 일자리가 없었던 빈곤층과 노동을 하지만 빈곤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빈곤층의 생존문제였다. 산업화로 인해 봉건주의 생산관계에서 추방된 대다수의 농노계층과 다행히 일자리를 얻었지만 부족한 임금으로 생활하기 어려웠던 도시 노동자들은 구조적인 빈곤의 희생양이 되었다. 빈곤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의 사회정책적인 개입이 시작되었지만 빈곤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다.

아담스미스는 근면함과 행운만 있다면 누구나 일급시민이 될 수 있고 이것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문제없이 보완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러한 시장은 아직까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주의 만능을 내세우면서 불평등을 개인의 문제로 합리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인간의 쓸모 여부를 시장의 필요에 따른 ‘보이지 않는’ 기준에 따라 사람의 등급을 매겨왔다.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보지 않는 기준’에 순응하거나 대항하기도 했지만, 꾸준히 경쟁구조에 노출되어 왔다. 시장의 근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개인의 노력으로 자신의 경제사회적 지위를 결정짓거나 변동시키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시장의 기본 생리는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며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차이를 경쟁을 통해 차별화시켜 생산된 불평등을 토대로 발전시키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빈곤이나 열등의 존재는 부와 우등의 존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자 결과이다. 그러므로 빈곤과 열등에 대한 관리는 체제를 유지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것은 진심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인권이나 권리적 차원의 접근이 아닌 최소의 비용으로 노동력 전체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관리비용적 차원으로 접근 된다.

자본의 입장에서 빈곤과 열등에 대한 관리는 시대에 따라 보수적이기도 하고 진보적이기도 하다. 진보적 경향의 시기는 전후 산업기반 복구를 위한 투자 차원과 포드주의 생산방식의 초과이윤을 재분배를 통해 더 많은 이윤확보가 가능했던 시기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윤율 축소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70년대 말, 구 사회주의권 폐망이후의 지구화 경향의 심화됐던 90년대 전후의 자본의 관리방식은 매우 보수적으로 유지되었다. 이에 역사적으로 가장 관대하고 보편적이었던 복지 대상자를 축소시켜왔고, 급여의 수준을 감소시켜왔으며 무엇보다 노동의 강제를 조건부 수급으로 강화시켜왔다.

신자유주의 시기 자본은 일하는 노동자에게 조차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고자 했다. 그 결과 해고자 및 실업자, 노인, 환자, 장애인의 사회권을 지지해 줄 만한 경제적 기반은 약화되었고, 이것은 다시 이들의 정치적 기반을 축소시켜왔다. 신자유주의 민주주의가 위험한 것은 경제적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의 ‘몫’이 정치적으로도 대변되지 못하면서 서서히 사회의 외부로, 존재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투표권만을 가진 개인으로 머문다는 점이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전에 영국에서는 베버리지 보고서를 통해 전 국민의 삶에 대한 최저 수준 보장을 국가의 책임으로 천명했고, 전후 UN의 세계인권선언 등을 통해 현대 국가의 중요한 책임으로 국민에 대한 ‘기초보장’이 제시되어 왔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자본주의 국가일지라도 적어도 최저 수준의 생존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천명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가 더 이상 굶주림과 여타의 차별로 사람들이 죽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조치로도 이해될 수 있다. 적어도 생명과 직결된 문제에 대해 국가의 방치와 관조로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들의 약속들이었다.

이러한 약속이 천명된 지 반세기가 훌쩍 넘었지만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인간의 기본권 자체는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아렌트의 표현대로 공론의 공간(public space)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사람들의 철저한 배제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유산이 되었다. 이들은 공리주의적 기준대로라면 잉여자이고 쓸모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고려의 대상 혹은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구분은 정의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발전을 몇 백 년 전으로 회귀시킨다. 우리 시대에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면 쓸모없다고 여겨지거나 쓸모를 다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모든 보이지 않는 기준과 구조에 대항한 근본적인 저항과 개혁이 절박하다. 이러한 근본적인 저항과 개혁이 수반되지 않은 채 ‘긴급복지’ 수준의 조치나 수급 대상 수준의 조정만으로 인간의 기본권 회복은 불가능하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기초보장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자 수는 전체 인구의 3%내외인 150만 명 이상을 유지해왔으나, 2012년 현재 144만 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축소는 빈곤율 감소의 결과가 아니라, 2010년과 2011년 두해 동안 4 차례에 걸친 복지부의 일제조사를 통해 11만 6천여 명의 수급권 박탈의 결과이다. 즉 탈수급자들의 빈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국가는 전산망을 통해 일제조사 기준 시점에서 제도의 수급조건에서 벗어나는 모든 대상자들의 수급권을 박탈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초보장의 사각지대 규모는 410만 명에 달한다. 이 중 정부 공식 통계에 따르면 1/3 수준인 103만 명이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수급을 받지 못하고 있다. 잔인할 정도로 엄정한 수급자 관리는 한국 정부의 빈곤에 대한 관리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에 빈곤단체는 부양의무자 기준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국가는 더 이상 그들이 왜 가난해졌는지에 집착해서 징벌하려 들지 말고 결과주의에 입각해서 가난 자체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더불어 장애등급제 역시 제한된 장애인 복지정책을 소수의 장애인에게만 제공한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질병으로, 해고와 실업으로, 장애로, 더욱이 여성이라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빈곤을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졌다. 이러한 참혹하고 냉정한 현실이 정확하게 진단되었을 때, 우리 사회가 사람의 가치와 권리에 대해 얼마나 외면하며 몇몇 사람의 이해를 위해 발전되고 있는지가 보일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전으로 제시되는 멋진 복지아젠다 보다는 당장 하루하루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절벽으로 내 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미래의 누군가의 과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우리 모두의 관심과 요구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더 이상 사라지는 사람들의 죽음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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