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으리으리하지 않다. 언젠가 꼭 남극에 가서 권총으로 내 머리를 쏘는 것이 나의 꿈이다. 갈 때가 되었다면 아무도 없는 춥고 새하얀 곳에서 끝내고 싶다. 뒤뚱거리는 펭귄들과 이빨 뾰족한 바다짐승들과 산처럼 솟은 눈부신 빙하들을 보며, 무슨 색깔일지 지금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남극의 하늘빛을 보며, 이왕 가야 한다면 그곳에서 그런 식으로 가고 싶다. 나는 지금 내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권총으로 머리를 쏴 총알을 관자놀이에 박아 넣기 직전까지 나는 분명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즈음 내겐 꿈이 하나 더 생겼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는, 어쩌면 돈을 모아 총을 사고 남극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는 그 꿈은 바로 ‘처절한 기타맨’ 형님의 평전을 쓰는 것이다.
▲ 1집 앨범 발매 기념 공연 중인 처절한 기타맨 형님 |
2.
아주 오래 전에 내가 꿈꾸었던 세상
이제 자꾸만 멀어져만 가
그런 내 어린 날에 꾸었던 꿈들
이제 자꾸만 스러져만 가
무대 위에는 기타맨 형님뿐이다. 의자에 걸터앉아 기타를 뜯으며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형님의 모습이 졸린 눈꺼풀 사이로 아물거렸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몸이 자꾸만 벽으로 기울었다. 담배나 한 대 물고 싶었지만 내 주위를 빼곡하게 채우고 앉아 있는 사람들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밤 나는 어느 송년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술을 많이 마셔 얼굴이 벌개진 내 맞은편에는 젊은 여자 분이 앉아 전혀 취한 것 같지 않는 손놀림으로 내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아마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여자 분은 몇 달 전에 어느 시민단체 일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니 그 시민단체에서 해야 했던 일이 자기가 생각했던 일과 많이 달라서였다고 했다. 그럼 어떤 일을 하고 싶었냐고 다시 물었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데 필요한 일을 하고 싶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보다 세 살 어린 그 여자 분의 말을 듣고 나는 새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분도 꼿꼿하게 앉아 깨끗이 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그 여자 분이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나는 이럴 때 써먹을 수 있는 맞춤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쁜 놈들에게는 피해를 끼치고 착한 사람들에겐 도움이 되는 그런 일이요. 하나 마나 한 말이었지만 그 여자 분과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언가를 알고서 끄덕거린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쪽을 보고 있으니 내가 그동안 거쳐 온 몇몇 공간들이 떠오르는 군요. 나는 내가 지금의 당신 나이일 때, 그러니까 꼭 서른 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 똑똑히 깨달았어요.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저절로 그렇게 되었죠. 나는 내 주변에 숱하게 깔린 사람들처럼 살 수는 없는 인간이었어요.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보기 싫은 책들을 보고, 결혼이란 걸 하기 위해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온몸에 주렁주렁 내걸고, 그렇게 집을 사고 아이를 낳아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집에 들어오는 식으로 일 년을 보내고 십 년을 보내고 이십 년을 보내고, 남들과 똑같은 것에 똑같은 이유로 행복해하고, 나는 그렇게 살기 싫은 게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걸 어느 순간 벼락 같이 깨닫고야 만 거예요. 그때부터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좁아져 버렸어요. 나는 돈이 많은 집안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모아둔 돈도 없고 그렇다고 훗날 챙길 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당장 먹고 살려면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형편이죠.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이 오순도순 잘 지내고 있는 직장에서는 도무지 오래 버틸 수가 없었어요. 그 어떤 간판을 내걸든 그들은 다 똑같았어요. 일해라. 열심히 일해라. 더 많은 결과물을 내라. 그것이야말로 치열함이다. 치열하게 살아라. 진보? 보수? 대안? 자립? 그런 건 다 겉치레였어요. 감투를 쓰고 윗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인간들은 어디든 다 비슷비슷하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던 거예요.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어요. 너는 대체 누구에게 뭘 기대했던 거야? 그리고 누구한테 뭘 실망한 거지? 처음부터 네가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너는 알고 있었나? 나는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죠. 그때부터 나는 누구에게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단단하게 이 세상을 살아 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기 시작했어요. 꿈이요? 내게도 꿈은 있어요. 방금 말했던 대로, 나쁜 놈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착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근데 그런 삶을 살려면 진보의 ‘진’ 자도 모르는 거지같은 곳보다 훨씬 더 더러운 진흙탕을 헤쳐 나가야 된다는 걸 나는 서른을 훌쩍 넘기고서야 알게 된 거예요. 시민단체? 진보단체? 물론 참 좋은 곳들 많죠. 하지만 그런 곳에서 일을 한다는 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온갖 추접스러운 것들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걸 뜻해요. 인간이란 존재가 원래 그런가 봐요. 추접스런 것들은 관계 속에서 생길 수도 있고 맡겨지는 일 속에서 생길 수도 있죠. 그게 나쁜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른 곳들도 다 마찬가지니까. 사람 사는 세상은 다 거기서 거기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거잖아요. 그쪽도 아마 그 시민단체에서 그런 일을 했을 테고 나도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어요. 근데 내 생각은 그래요. 누군가가 꼭 해야 하는 일 치고 하찮은 일은 없다고. 나도 예전에는 그쪽과 비슷한 이유로 몇 군데를 때려치운 적이 있는데요. 결국은 둘 중 하나였어요. 전태일이냐, 전두환이냐. 헌신이냐 탐욕이냐. 우리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모두 그 둘 중 하나로 살아가요. 근데 나는 전두환처럼 되기는 싫었지만 전태일처럼 살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헤매던 중에 이곳에 눌러앉게 된 것이고, 아직은 후회하지 않아요.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흔들리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걸 오래 전에 배웠거든요.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권력을 쥔 개자식들의 딴죽을 걸고 낯짝에 침을 뱉는 일이죠. 그런데 결국 그거였던 거예요. 사무실 청소를 하든 짐을 나르든 포스터를 붙이든 영수증을 만들든 그 하찮게 보이는 일들이 하나하나 모여 그 개자식들의 목덜미를 베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나는 요새 그 재미로 살아요. 그래서 여기서 일하는 게 무척 재미있어요. 그쪽이 어떤 삶을 꿈꾸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 일은 일일 뿐이에요. 일은 원래 재미가 없고 힘들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법이고, 그런 일들은 대부분 하찮게 보이죠. 그 하찮음마저 자기 것으로 끌어안고 갈 수 있어야 해요. 그렇게 되면 그 하찮음은 더는 하찮음이 아니게 돼요. 전태일이냐 전두환이냐, 여전히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난 그래요.”
이렇게 떠들고 싶었지만 나는 그 모든 말들을 술과 함께 왈칵 삼켜 버렸다. 그 여자 분은 여전히 해사한 얼굴로 옆 사람과 술을 마시고 있었고 나는 오늘 밤이 지나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를 그 얼굴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토막토막 끊어진 채로 생각이 날 뿐이다. 나랑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분이 술에 못 이겨 뒤로 고꾸라졌고 사람들이 주섬주섬 그 분을 일으켜 세우고는 택시를 태워 보냈다. 문제는 내가 벗어 놓은 외투를 그 분에게 입혀 보냈다는 것이다. 취해 해롱거리던 나는 그곳을 나오려고 신발을 신을 때야 그 사실을 알고서 몹시 허둥거렸다. 내 옷은 대체 어디 간 거야? 그 여자 분은 이런 밤의 이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 다른 사람들을 챙겼고, 곧이어 다른 누군가와 함께 내 팔을 잡고 바깥으로 나왔다. 우리 한 떼거리는 그 여자 분이 이끄는 대로 24시간 환히 불을 밝히는 어느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의 끝을 분식집으로 하다니 술을 마실 줄 아는 분이구나. 분식집이야말로 값싼 국물들로 속을 달랠 수 있는, 술꾼들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아닌가!
하지만 그곳에서도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나를 그 여자 분과 다른 두엇이 한사코 데리고 나와 택시를 태웠다. 나는 감사하다는 말도 못 꺼내고 택시 안으로 구겨 넣어졌고, 탕 하고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 여자 분은 내 곁에서 사라졌다. 꼭 꿈을 꾼 것 같았다.
택시를 탔지만 바로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아침에 후배 이삿짐을 날라 주기로 며칠 전에 약속했기 때문이다. 후배가 사는 곳 주소를 대고 잠시 눈을 붙이다가 기사님이 깨워 값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렸다. 외투가 없으니 잠깐 사이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나는 후배네 자취방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옹송그리고 잠에 빠졌다.
너무 추워 눈을 뜨니 이미 날은 환하게 밝았고 방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몇 안 남은 짐을 누군가가 끙끙거리며 나르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지만 내가 자는 사이 이사가 다 끝났다는 것을 알고서 나는 구겨진 종이를 펴듯 몸을 일으켜 얼른 바깥으로 나왔다. 후배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바들바들 떨며 지하철을 타고 집에 다다르니 외투도 없이 이 추운 아침에 들어온 꼴사나운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불 같이 화를 내며 내 얇은 겉옷을 가위로 북북 찢었고 나는 그대로 집에서 쫓겨났다. 내 옷을 입고 간 분과 힘들게 연락이 닿아 겨우겨우 옷을 찾아 입긴 했지만 쉴 틈도 없이 후배 결혼식에 가야 했다. 결혼식장에서 해장을 하고는 바로 홍대 쪽으로 넘어와 ‘살롱바다비’라는 공연장에 들어가 기타맨 형님을 만났다.
“돈은 내고 들어왔냐?”
지쳐 걸레쪽이 된 몸을 질질 끌고 지하 공연장으로 내려온 내게 기타맨 형님이 한 마디 툭 던졌다. 입장료 만오천 원이 없었던 나는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한구석에서 쿨쿨 자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형님은 물론 내게서 돈을 받지 않았다.) 형님의 ‘1집 앨범 발매 기념’ 첫 공연이었다. 조금 뒤 나를 흔들어 깨운 형님이 내게 따끈따끈한 새 CD 한 장을 건네주었는데 거기엔 오늘 날짜와 형님의 이름, 그리고 ‘씨댕!’이라는 말이 크게 적혀 있었다.
▲ 기타맨 형님의 1집 앨범 표지 |
3.
머리에 민들레꽃 피운 사람 있었다지
정말일까?
머리에 민들레꽃 피운 사람 많았다지
정말일까?
살랑살랑 어깨춤이라도 추고 싶어지는 노래가 들려온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데엔 잔뼈가 굵은 기타맨 형님이지만 어머니까지 앞에 모시고 자기 첫 앨범 곡을 부르다 보니 가슴이 벌렁거릴 수밖에 없었나 보다. 보통 때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저 형님을 처음 본 게 언제 어디서였더라, 노래를 듣다 보니 오랜만에 옛 기억들을 뒤적거리고 싶어졌다.
기타맨 형님과 처음 만난 건 벌써 6년 전, <삶이보이는창(삶창) 르포문학모임>에서였다. 아직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기도 전에 나온 『부서진 미래』와 청계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마지막 공간』이라는 책 두 권을 나는 군대 들어가기 전에 읽었고, 나중에 군대에서 나오게 되면 꼭 르포문학모임에 들어가 글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7년에 스물일곱 나이로 제대하니 르포문학모임은 어느덧 5기 모임을 열고 있었고 기타맨 형님을 바로 그 모임에서 만났다.
아직도 기억난다. 삶창에서 열었던 르포문학 강좌들을 들으러 어느 강의실로 찾아갔더니 비쩍 마른 얼굴에 머리카락은 예수처럼 덥수룩한 웬 사람이 강의실 뒤쪽에서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처음엔 영상 찍으러 온 일꾼인 줄 알았더니 뒤풀이에서 만난 그 형님은 ‘처절한 기타맨’이라는 이름을 쓰는 르포문학모임 4기 선배였다.
그때부터 형님과 나는 이런 자리 저런 자리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서로의 마음이 사랑 때문에 달아오르는 것도 보았고 그 사랑이 형편없이 부서지는 것도 보았다. 우리는 많은 책을 읽었고 그 책이 어쩌고저쩌고 수다를 떨었으며 몇몇 글쟁이들은 아예 껌처럼 씹어 댔다. 그리고 르포문학모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갖 현장을 누비고 다니며 글을 썼고 실은 글 쓰는 시늉을 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글을 망쳤다. 형님은 때로는 카메라를 들고 현장 속으로 들어갔고 때로는 기타를 치며 술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자기가 만들었다고 들려주는 노래들은 생각 보다 듣기 좋았다. 나는 글을 쓰고 또 쓰는 생활을 되풀이하며 점점 글 쓰는 일 말고는 딱히 잘하는 것이 없는 인간으로 변해 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나니 결국 기타맨 형님과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무엇 하나 해 놓은 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형님과 내가 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결론에도 아랑곳없이 내키는 대로 살 수 있었다는 점에서였다. 형님과 내게 인생이란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그 무엇이었다. 형님도 나도 ‘진보’라는 말을, 아니 그 그럴싸한 말을 유행어처럼 입에 올리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먹고살 만한 인간들을, 감투를 쓴 인간들을, 으리으리한 말로 우리를 꼬드기는 인간들을, 멀리서 팔짱 끼고 이빨만 까는 인간들을 싫어했다. 대신 우리는 조세희 선생님과 윤정모 선생님을 좋아했고, 현장에 꾸준히 몸과 마음을 바치는 이름 없는 노동자들을 좋아했다.
2008년, 촛불집회가 온 나라에 퍼지자 기타맨 형님은 어느새 ‘칼라TV’라는 미디어 단체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형님을 졸졸 따라다니다 보면 진중권이나 정태인 같은 이름값 비싼 분들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광화문이 최루액과 물대포로 희뿌옇게 되는 밤이면 카메라를 든 형님과 ‘칼라TV’ 이름이 박힌 생중계 노트북 한 대를 끌어안은 누군가가 전경들 바로 코앞까지 바싹 다가가 영상을 찍었다. 요새야 ‘팩트TV’다 ‘고발뉴스’다 ‘뉴스타파’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이런저런 ‘대안언론’들이 많지만 그때는 내가 알기론 오직 칼라TV뿐이었다.
그때까지 하던 다른 공동 작업을 접고 촛불집회 현장을 글로 기록하고자 했던 우리 르포문학모임은 촛불집회가 어쨌다는 글 몇 편을 이런저런 인터넷 언론에 싣고 나서는 자꾸만 힘이 떨어져 갔다. 서른 살을 코앞에 둔 나는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어떤 것 때문에 도저히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고 기타맨 형님은 형님대로 영상 찍으랴 노래 만들랴 연애질 하랴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형님과 나의 눈에는 제정신으로 사는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전경들에게 두들겨 맞는 꼴을 허구한 날 지켜보아야 했던 형님은 그즈음부터 자주 나쁜 꿈을 꾸었고 나 역시 천막 농성하는 노동자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며 내 속에 맺혀 있는 무언가를 풀려고 했다.
내 속에 맺혀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안줏거리도 못 되도록 후줄근하게 끝난 짝사랑? 점점 기울어만 가는 집안 형편? ‘장기투쟁사업장’들의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파업? 시간이 지나자 코빼기도 안 보이게 된 ‘촛불시민’들? 쪼개진 진보 정당들? 안정된 직장과 행복한 결혼을 앵무새처럼 이야기하는 내 어머니? 아니면 그 모든 것들에 꿋꿋이 맞서지 못하고 술에만 기대는 허약해 빠진 나 자신? 그리 오래 전 이야기도 아닌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 시절 나는 밑바닥이었고, 그 정도가 밑바닥이었던 걸 보면 내 깊이란 것은 아주 얕았을 것이며, 돈 많은 놈이 돈으로 허세 부리듯 돈 없는 나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 언젠가부터 글도 더는 쓸 수가 없었다.
글? 나는 2007년에 한창 터져 나온 이랜드 노동자들의 싸움에 끼어들면서 처음으로 ‘현장’ 글을 썼다. 쓴다고 해도 어디 실을 곳도 없었고 읽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때가 아마 ‘이랜드 노동조합 추석 집중 투쟁’이 벌어지던 즈음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들의 싸움을 기록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집회에 찾아가 그날 있었던 일들을 모조리 수첩에 적고 집에 와서 글로 옮겼다. 어디에 올릴까 하다가 이랜드 노조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렸다. 그렇게 꾸준히 이랜드 노동자들의 싸움을 기록하는 와중에 조합원 형님 누님들과도 친해졌고 월드컵경기장 앞 천막 농성장에서 하룻밤씩 묵어가는 날도 늘어 갔다. 그러다가 집회에서 ‘참세상’ 기자 분과 만나게 되었고 (공교롭게도 그분은 ‘르포문학모임’이 처음 생겼을 때 함께 했다는 분이었다) 그분이 참세상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 주었다.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라는 어쭙잖은 이름은 그때 처음 생겼다.
뭔가 쓰기는 되게 열심히 썼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쓸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잔망스런 생각도 있었지만 일단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좋았다. 게다가 부자 언론에서는 결코 다루지 않는 노동자들의 싸움을 글로 써서 어떻게든 세상에 내놓으면 그들이 싸워 나가는 데 털끝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나를 더욱 부추겼다. 학원에서 국어 강사 노릇을 하며 차비와 술값을 벌었고 남는 시간에는 현장을 돌아다녔으며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새벽까지 글을 썼다. 물론 나는 그런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하는 일이라고는 술 먹고 글 쓰는 게 전부라 그랬는지 몸과 마음이 건전지처럼 조금씩 닳아 갔다. 내 손에서 나오는 글들이 점점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고, 생존권이니 투쟁이니 저항이니 뭐니 글을 통해 ‘옳으신 말씀’을 함부로 떠벌려도 될 만큼 내가 ‘잘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끊임없이 갉아먹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쓰는 르포 작가입네 시늉을 하고는 있지만 내 속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할 더러운 욕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주제에 써 내는 글은 이게 일기인지 소설인지 수필인지 르포인지 뭔지 종잡을 수 없는 잡탕이었다. 노동자들이야 내가 글을 써 주면 입을 모아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그들 앞에서 차마 글 쓰는 사람 행세를 할 수 없었다. 나는 현장에 있는 그들이 한뎃잠을 자든 두들겨 맞든 얼마든지 모른 척할 수 있는 알량한 글쟁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글을 쓰기 위해 현장에 가서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걸까? 내가 쓰는 글 나부랭이로 대체 누구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까? 묻고 또 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르포문학모임에서 만난 한 여자 분에게 남몰래 품어 오던 사랑이 그즈음 박살나 버렸고, 그것이 방아쇠가 되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르포문학모임에도 등을 돌린 채, 당시 함께하기로 했던 ‘용산 철거민 르포 작업’도 내팽개치고 집에 틀어박혀 며칠을 몸져누워 끙끙 앓았다. 그 뒤로 기타맨 형님과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4.
그 오래된 숲에 들어가 나는
슬픈 노래를 부르고
머리 위로는 작은 새들이
동그란 둥지를 짓고
그 오래된 숲에 들어가 나는
쓰달픈 꿈을 꾸었네
다시 공연장. 기타맨 형님은 자기가 노래를 못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냥 부른다. 형님의 목소리엔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에 끼어 있는 기름기가 없다. 깊은 울림도 없고 매끄럽게 감기는 맛도 없는, 귀를 쫑긋 세우지 않으면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건만 나는 형님의 목소리가 좋다. 아마 나도 노래를 못 부르기 때문일 거다. 나는 무언가를 못하는 사람의 그 ‘못함’을 좋아한다. 나도 딱히 잘하는 게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형님이 시청 앞 재능교육 천막 농성장에서 만들었다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눈에 힘을 빼고 아무 곳이나 바라보다가 공연장 천장에 나란히 달려 있는 조명에 눈이 갔다.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신호등인가? 세 불빛은 사이를 두고 제멋대로 깜박거리며 무대 위 기타맨 형님을 비추었고 조명 탓인지 형님의 노랫소리는 보통 때보다 더 ‘그럴 듯하게’ 들렸다. 가운데 달려 있는 노란색 불빛. 거리에 있는 신호등에서는 아주 잠깐 사이에만, 초록불과 빨간불 사이의 그 짧은 순간에만 볼 수 있는 불빛. 빨간불을 기다리지만 빨간불이 켜지면 제 몸을 숨기는 노란 불빛. 초록빛이 있었다는 기억을 잊어야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노란빛. 무언가를 잊고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오래 존재할 수는 없는, 사이의 불빛.
그랬던가. 어쩌면 그들은 노란 불빛이 되어 서로를 부르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요 몇 주일 동안 ‘안녕들 하십니까’라고 시작되는 대자보들이 온 나라의 대학들을 뒤덮었다. 대학생들이 쓰자 대학생이 아닌 사람들도 대자보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새 ‘안녕들 하십니까’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만하지 못한 세상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뜻깊은 인사말이 되었다. 대자보들은 저마다 쌍용차 노동자, 철도 노동자, 밀양 할머니 할아버지, 현대차 노동자 등등 ‘아픈’ 이름들을 부르고 있었고 같은 이름을 부르고자 하는 이들이 자신의 대자보로 목소리를 보탰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을 넘어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대자보들은 인사말이라기보다 차라리 철학이었다. 이제 우리는 철학을 해야 할 때라고 대자보들은 아우성치고 있었다.
물론 나는 대자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700만에서 800만 명쯤 되는 이 나라의 20대 중에서 대학생의 숫자는, 그것도 야간대학과 전문대학을 다니는 사람들까지 모두 합한 수는 300만을 조금 넘는다고 한다. 채 절반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대학생들이 특권을 쥔 젊은이들이라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졸업하지 않은 사람을 견주는 시선은, 이른바 ‘명문대’ 졸업생과 명문대가 아닌 대학 졸업생을 견주는 시선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고약하다.
나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명문대를 나왔다. 대학 다니면서 나는 온갖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나 있는 차별들을 알게 되었고 학벌이 그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알았다. 학벌은 너무나 쉽게 생긴다. 그 대학에 입학해 졸업만 하면 된다. 즉 입으로는 아무리 학벌주의에 반대한다고 지껄여도 자기가 다니는 대학을 (그것도 명문대를) 꾸역꾸역 졸업한다면 말짱 헛짓거리가 되는 것이다. 학벌을 싫어하면서 이놈의 대학을 끝끝내 졸업하려는 이유는 뭘까? 나는 이 물음을 대학 4학년 때 처음 내게 던졌다. 지금까지 왜 그 생각을 못하고 살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간단한 물음이었다. 대학 까짓 거 그만두면 되잖아? 그럼 내 학벌은 더는 다듬어지지 않고 뭉툭하게 끝날 거야. 비록 4학년까진 왔지만 여기서라도 끝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학벌 계단’의 꼭대기에 올라서는 것을 멈출 수만 있다면.
그러나 나는 대학을 그만두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땅을 치며 울음을 쏟아내실 어머니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도 명문대 졸업장과 함께하는 내 장밋빛 앞날을 은근히 꿈꾸고 있었을까? 어쨌든 나는 명문대 졸업장을 끝내 포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훗날 어느 곳에 이력서를 보내든 언제나 ‘최종 면접’까지 갈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졸업장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 이력서에 적힌 대학 이름은 마치 붉은 펜으로 밑줄을 죽죽 그어 놓은 듯 눈에 확 띈다. 이건 숨긴다고 어떻게 될 문제가 아니다. 자기 마음속에 자리한 욕망의 크기를 어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자신이 무엇을 포기할 수 있고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를 헤아려 보는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많은 걸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더는 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손에 쥐고 있는 걸 버리기 싫어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군대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 이런저런 일자리에서 면접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포기하지 못한 욕망의 크기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어느새 명문대 졸업생이라는 괴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글을 쓰면서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내가 무슨 말을 내뱉든 무슨 발버둥을 치든 나는 노동자들과 같은 입장에 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작은 권리 하나를 위해 온몸과 온 마음을 바쳐 싸웠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쳤다. 그들은 천막에서 자고 크레인 위로 올라갔으며 밥을 끊고 해골처럼 말라 갔다. 나는 그들이 불쌍해서 마음 아팠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지만 내가 그들과 같은 종류의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 도망칠 곳이 있는 명문대 졸업생이라는 것, 곁에서 들여다보며 글만 쓰면 땡인 글쟁이라는 것, 그들보다 적게 일해도 그들보다 많이 먹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틈만 나면 나 자신을 아프게 쿡쿡 찔렀다. 한 마디로 나는 숱한 소설 속에 그려진 바 있는 ‘얼치기 룸펜 프롤레타리아’이자 ‘창백한 인텔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답은 없었다. 이미 졸업해 버린 대학을 물릴 수는 없었다. 대신 내가 버리지 못한 욕망의 크기를 기억하면서 하루하루 더 ‘치열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 얼마나 부질없는 말일까. ‘치열하게’라니! 대체 무슨 삶을 어떻게 살아야 치열하게 사는 것이 될까?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는 삶은 치열한 삶일까, 아닐까? 허벅지를 베어 어머님께 국 끓여 드렸다는 효자처럼 자기 몸 버리면서까지 자본가들과 싸우면 치열한 삶이 될까? 아무런 답도 찾지 못한 채 나는 냅다 글만 썼고 결국 이 따위 글을 쓸 바에야 몽땅 집어치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런데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붙인 그 많은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특권을 손에 쥔 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코피 터지도록 공부하고 눈 벌개지도록 스펙을 쌓는 것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버리지 못한다면 대학을 졸업해서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뻔한 그 사실을 그들은 깨닫고 있을까? 궁금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러저러하게 살았는데 알고 보니 세상에는 이러저러한 싸움들이 있더라. 그래서 지금 내 기분은 이러저러하다. 앞으로는 이러저러하게 살고 싶다. 다들 안녕들 하십니까?’ 이렇게 줄여 말할 수 있는 대자보들이 내 눈에는 좀 배운 놈들의 말잔치로만 보였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너희들이 앞으로 하나씩 차지하게 될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너희들에겐 있느냐?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안녕들 하시냐고 묻지 마라」는 글을 썼고 늘 그랬듯 참세상에 넘겼다. 그러나 그건 내 얼굴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 다름 아닌 내가 바로 명문대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글에서, 대자보 하나 쓰고 끝내지 말고 차라리 대학을 그만둬서 이 세상의 질서에 정면으로 맞서라고 했지만 사실 그건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나는 대학 안에 남아서 대학을 바꾸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할 게 아니라 군대에 들어가 군대를 바꾸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소리만큼이나 믿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대학생들에게 대학을 때려치우라고 말했다. 그 방법 말고는 없다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해결책? 해결책은 어차피 없다. 인간의 마음을 죄다 뜯어고칠 수 있는 기계가 만들어지면 세상은 좀 달라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계가 있는 세상은 지금과는 다른 모양을 한 지옥일 것이다. 인간은 이길 것을 미리 알고서 싸우는 존재가 아니다. 질지도 모르는 싸움이라도, 아니 지는 것이 확실한 싸움이라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싸울 때도 있다. 내 말대로 대학생들이 정말 대학을 그만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대학과 취직이라는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삶을 찾는 젊은이들이 늘어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졸업장 없이 먹고살아야 하는 그들은 술장사를 시작할 수도 있고 마약을 몰래 들여올 수도 있다. 오히려 거리에서 집회라도 하면 차 막힌다고 혀 끌끌 차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대학을 때려치운다고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학벌주의나 다름이 없다.
나는 어쩌면 안녕들 하시냐고 묻는 대학생들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서 가슴속에 응어리만 잔뜩 고여 있는 이들. 정작 특권은 포기하지 못하면서 자기가 쥐고 있는 특권은 끔찍이 싫어하는 이들. 이렇게 살기는 싫지만 저렇게 살 수는 없는 어중간한 존재들. 그래서 피가 거꾸로 솟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 모습 그대로 보기 흉한 내 모습이었기에. 대학을 그만두라고 했던 나의 글투정은 자기가 가지 못한 길을 자기 자식에게 억지로 가라고 하는 부모들의 ‘꼰대짓’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나라 20대 가운데 절반도 안 되는 대학생들이다. 그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하는 다른 청춘들과 달리 토익 책 파먹을 ‘시간’이 있고, 취업이 아니라 취업을 준비하기 위해 당장 ‘알바’만 해도 되는 형편이며,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들은 아직 ‘특권층’이 아니지만 특권층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뱃속이 부글거리는 이들이다. 대자보 몇 장 따위로 그들의 삶은 결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찌 되었든 서로를 부르며 신호를 보냈다. 깜박거리는 노란 불빛처럼. 초록불과 빨간불 사이에서 어느 순간 빛났다가 사라지는, 무언가를 잊어야 하고 무언가를 기다려야 하는 그런 불빛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는, 뭔가 다른 방식의 삶을 기다리고 싶어도 차마 기다릴 수가 없는 이들이다. 그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다른 색 불빛으로 스스로를 바꿀 것이다. 하지만 그 깜박이는 순간의 어떤 떨림 같은 것이 차마 그들에게 등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그건 내가 오래 전에 지녔던 떨림 같기도 하고, 술 한 잔 먹으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하지만 술에서 깨어나면 아무것도 없을 그런 떨림 같기도 하다. 결국 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나이기 때문일까?
그럼 나는, 나는 그들처럼 누군가를 불러 본 적이 있을까? 지금도 누군가를 부르고 있을까? 아니면 목소리를 내는 법도 다 잊어먹은 채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있을까? 적어도 그들은 안녕들 하시냐고 물으며 솔직하게 굴기라도 했지, 애타게 누군가를 부르기라도 했지, 나는?
5.
그대가 찬 눈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면
난 소리 없이 내리는 흰 눈에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건배를 할 거예요
크리스마스 이브 같은 축배를 들 거예요
내 마음속 사랑이 박살나던 비슷한 즈음에 기타맨 형님의 연애도 끝났다. 이 노래는 그 연애가 끝나고 난 뒤 만든 거라며 오래 전에 내게 들려준 적 있었다. 첫 앨범을 한창 녹음하던 중에 만난 기타맨 형님은 사람들이 이 곡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내게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원래 그런 거잖아요. 시인들도 한바탕 소란스런 연애가 끝나고 나면 남는 건 시 몇 편뿐이라잖아요. 공연장 안에 이 노래가 흐르자 나를 스쳐간 여자들의 얼굴 몇몇이 떠올랐고 어젯밤에 마주앉았던 해사한 얼굴도 생각났다.
2009년, 나는 어느덧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르포문학모임 사람들과 더는 만나지 않다 보니 기타맨 형님과도 통 만날 수 없었다. 용산 철거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작업에서 멋대로 발을 뺐다는 사실은 그 뒤로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졌고 아무리 햇볕을 쬐도 몸도 마음도 보송보송해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꼬마들과 함께 지내는 자그마한 공부방에 들어갔다.
그때는 몰랐지만, ‘토끼똥’이라는 이름의 공부방에서 지낸 일 년은 내 몸과 마음을 한껏 추스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알고 보면 순수하지 않다. (그 ‘순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게다가 거짓말도 곧잘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적어도 나보다는 삶이란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아이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였다.) 걸핏하면 이 세상을 등지고 싶어 했던 나는 아이들과 엎치락뒤치락 뒹굴며 죽음을 조금씩 잊어 갈 수 있었고 그게 또 내 마음에 묘한 위로가 되었다.
기타맨 형님의 연애는 오래 전 일이지만 노래로 남은 한 바로 어제 일이기도 하고 노래가 살아있을 먼 훗날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건배를 아무리 하자고 졸라도 형님의 여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한여름 소나기처럼 부질없었던 사랑 말고도 나도 형님처럼 누군가를 목 놓아 불러본 적이 있었다.
반년을 토끼똥 아이들과 함께 보내고 나니 여름방학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위한 깜짝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열 명이 넘었던 꼬마 친구들에게 동화 한 편씩 써 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들의 숫자대로 동화가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공부방 총무를 맡은 누나는 내게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고는 했다. 잘 써져? 기대하고 있다고. 후후. 그런데 막상 글은 잘 써지지 않았고 나는 하루하루를 책을 읽거나 술을 마시며 지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해 뒷산에 올라가 한나절을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아무 말이 없는 바윗덩어리나 풀포기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제 뭔가를 좀 쓸 수 있을 것 같아지기도 했지만 집에 돌아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늘 제자리였다. 한 줄도 써지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 한명 한명을 떠올리며 그 친구들과 어떤 추억이 남아 있는지 내 속을 온통 헤집어 보느라 잠까지 설쳤다.
방학 끝나기 열흘 전쯤에야 비로소 글을 시작했다. 한 번 시작하자 글은 무서운 빠르기로 몸을 불려 며칠 지나지 않아 꼬마들 모두를 위한 동화집을 만들 수 있었다. A4로 150 쪽이 나왔다. 총무 누나한테 동화집을 이메일로 보내 먼저 읽어보라고 했는데 며칠 뒤 누나는 내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을 했다.
“얘기가 바뀌었던데? 그거 걔 이야기 아냐.”
큰일이었다. 아이들 한명 한명과 얽힌 추억을 글감으로 동화를 썼는데 내가 어떤 한 아이와 함께 겪었던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니 다른 아이와 겪었던 일이었단다. 이제 와서 새 동화를 한 편 다시 쓰자니 시간도 없었고 (곧 2박 3일로 예비군 훈련을 떠나야 했다) 내 마음도 그 아이를 향한 미안함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갈팡질팡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누나를 만나 내가 준 글을 다시 달라고, 거짓 추억이 담긴 글을 아이들이 보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는데 누나는 그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냈다.
“이게 네가 썼다고 네 글인 줄 아니? 이건 너와 아이들 모두의 글이야. 어떻게 네 맘대로 이 글을 버릴 생각을 하니?”
누나는 내 맘대로 하라고 톡 쏘아붙이고는 집에 가 버렸고 나는 그날도 술을 잔뜩 마신 채 집에 돌아왔다. 어떻게 할까, 수없이 되뇌며 자리에 누웠지만 답은 없었다.
아니, 답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새하얀 햇살 때문에 깨어난 나는 바로 이 이야기를 써서 동화집 맨 마지막에 싣기로 했다. 아이들을 위해 동화를 썼지만 추억 하나가 어긋나 버리는 바람에 고민에 빠진 한 공부방 선생님의 이야기! 아이들 사이에서 ‘고래’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나는 새 이야기 제목을 「고래의 꿈」이라 짓고 당장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줄거리는 이랬다. 고래 선생님은 자신이 잘못 쓴 동화 때문에 골치를 앓다가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곯아떨어진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 고래 선생님은 창문으로 날아올라 드넓은 바다 속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정말 고래가 되어 고등어 친구 ‘푸르미’와 함께 바다의 지혜로운 어르신 ‘문어 할아버지’를 찾아가게 된다. 어렵게 만난 문어 할아버지는 고래 선생님에게 “너의 실수도, 네가 쓴 글도 다 너의 것이고 아이들 것이니 함께 나누면 되지 않겠느냐”며 꿀밤을 먹이고 고래 선생님은 다시 힘을 얻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난다. 푸르미는 반짝반짝 빛나는 고등어 무리들 속으로 돌아가고 고래 선생님은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던 꿈에서 깨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고래의 꿈」이라는 새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다 쓰고 나니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두어 시간 있으면 예비군 훈련을 나가야 했다. 나는 새로 쓴 이야기까지 내가 쓴 동화들을 갈무리해 묶고,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머리말’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걸 쓰기 시작했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그냥 너희들에게 주고 싶었다고,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힘들었지만 너희들과 함께했던 추억을 다시금 떠올리는 일은 정말 행복했다고, 너희들이 그냥 재미있게 읽어만 준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다고, 대충 그런 식으로 썼다. 아이들의 이름을 한 글자 한 글자 자판으로 칠 때마다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마지막 줄을 쓰고 원고를 마무리하며 느꼈던 그 두근거림을 나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창밖으로는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흘러들어오던 조용한 방안에 컴퓨터 앞에 앉아, 아이들에게 내가 쓴 원고를 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몸까지 떨며 혼자 낄낄거렸던 그 순간이,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누군가를 위해 정말 온힘을 기울여 즐겁게 글을 썼던 첫 경험이었고 그만큼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원고를 다시 총무 누나에게 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지만 그 원고는 끝내 아이들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150 쪽이 넘는 원고를 한장 한장 프린터로 뽑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엔 우리 공부방 선생님들은 시간이 없었고 종이 값도 없었다. 아마 지금도 내 원고 「토끼똥 아이들 이야기」는 총무 누나의 이메일 속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거니까. 떠나간 연인을 생각하며 크리스마스 이브에 건배를 드는 것처럼.
그 뒤로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난 뒤 다시 현장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그때 생각을 많이 했다. 아이들을 위해 새벽까지 꼬박 글을 쓰던 시절, 아이들이 내 글을 읽을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어 견딜 수가 없었던 그 시절의 마음을 다시 떠올려 보고 싶었다. 나는 노동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쓴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고 다녔고 지금도 그렇지만, 때로는 그 ‘위해서’라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노동자들을 위해서? 그들의 싸움에 힘이 되기 위해서? 나는 그런 말들을 되게 싫어한다. 노동자들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불쌍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노동자들을 ‘위한다’고 할 때 나는 노동자가 아닌 존재로서 그들과 나뉘게 되고, 노동자들은 노동자가 아닌 내게서 무엇인가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현장에서 싸우는 노동자들 치고 나보다 마음이 넉넉하지 않은 사람을 나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자기 삶을 송두리째 걸고 싸우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주고 싶었고, 마침 내가 할 줄 아는 게 글을 쓰는 것 말고는 없으니까, 글을 주고 싶었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것을 글로 쓴다고 떠벌리지만 막상 내 속의 어떤 욕망 때문에 글을 쓰게 되는지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다. 나 자신을 위해서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위해서일 수도 있다. 나는 노동자들을 불쌍한 사람들로 만들고 싶진 않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 뭔가를 주고 싶다. 그들이 내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도 된다. 그럼 이 마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새벽까지 잠도 못 자고 가슴 떨려 하며 글을 쓰던 그 순간, 나는 나 혼자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을까? 아이들을 내가 글이라도 써서 줘야 하는 불쌍한 존재들이라 생각했을까? 아니다. 나는 아이들이 내 글을 읽어 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노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노동자들이 내 글을 읽어 주는 것 말고 바라는 것이 없었다.
오래 전 천막 농성장에서 밤새 술잔을 기울이던 형님 누님들이 이런 내 군소리를 듣는다면 뭐라 하실까? 위해서니 뭐니 고민하지 말고 일단 글부터 쓰라고 지청구를 먹일까? 아니면 술이나 한 잔 더 하라고 내 잔에 술을 따를까?
6.
나른한 오후 무엇을 할까
잠은 안 오고 곰곰이 생각해
나른한 오후 나른한 오후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느 곳에선
많은 사람들 맞아서 죽지
나른한 오후 나른한 오후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느 곳에선
많은 애들이 굶어서 죽지
나른한 오후 나른한 오후
정말 나른하기 짝이 없는 이 노래는 기타맨 형님 첫 앨범의 첫머리 곡이다. 앨범 나오기 얼마 전에 합정동에 있는 칼라TV 사무실에 놀러가서 형님과 술을 퍼먹다가 이렇게 물어본 적 있다. 왜 이 노래가 1번이에요? 형님이 말했다. 이 노래가 내 음악 스타일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처음엔 일상적인 얘기들을 하다가 뒤에서 맞아 죽고 굶어 죽는 얘기로 확 넘어가잖아.
그랬다. 형님의 노래들엔 듣는 이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뭔가가 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듣지 말라고, 당신이 어디서 뭣에 걸려 넘어졌는지 좀 보고 가라고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뭔가가 있다. 우울한 얼굴로 혼자 술을 마시다가도 문득 떠올리고서 낄낄거릴 수 있는 그런 깨소금 같은 맛이 형님의 노래들 속엔 고루 뿌려져 있다. 내가 내 글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쓰는 것처럼 형님은 형님의 노래를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자기 마음대로 만든다. 그런 식으로 오랜 시간 동안 노래를 만들다 보면 저절로 손에 배는 버릇 같은 게 있어서 형님이 그렇게 노래를 짓는지도 모른다.
어둑어둑한 공연장 안에 한없이 나른한 노래가 흐르니 다시 졸음이 왔다. 나른한 오후. 토끼똥 공부방을 그만두고 나서는 무엇을 하든 지겹고 나른하기만 했었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뭘 해야 하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던 시간들.
2010년이 되자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 내가 일자리 구할 생각은 안 하고 꽁지에 불붙은 여우처럼 이곳저곳 중뿔나게 싸돌아다니는 동안 집안은 거지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식구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몸이 아파 병원비는 듬뿍듬뿍 들어가는데 막상 우리 집 살림은 빈털터리여서 어쩔 수 없이 전부 다 빚을 냈다. 나는 대학 전공을 팔아먹기로 마음먹고서 기간제 국어 선생 자리가 난 학교들을 부지런히 훑고 다녔다.
그 뒤로 3년 동안 나는 보따리장수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돈을 벌었고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글을 쓰기는커녕 뉴스도 보지 않고 세상일에 등을 돌린 채로 살았다. 한동안 임용고사를 준비하겠다고 어머니를 속여 넘기며 시립도서관에서 소설책만 실컷 읽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이 내 삶이 이렇게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몸도 마음도 나른해졌다. 잠을 아무리 많이 자도 늘 머릿속은 흐릿했으며 퇴근하고 나서 술을 사와 방에서 혼자 홀짝이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
학교 하나와 계약이 끝나면 다음 학교에서 선생 자리를 구할 때까지 그냥 놀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게 떠오를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몇 달 동안 그렇게 방구석에 안겨 멍하니 지내다 보니 더는 심심함을 참지 못한 내가 드디어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한 일은 만화책 100여 권을 인터넷에서 내려 받아 밤을 새워 가며 읽는 것이었다. 아침이 되면 씀벅거리는 눈으로 잠들었고 오후에 다시 일어나 다음날 새벽까지 또 만화책을 봤다. 그렇게 얼마 동안 살며 만화의 참맛에 흠뻑 빠져 지내고 나니, 나는 이야기 읽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화책 다음엔 음악이었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듣도 보도 못한 앨범들 몇 백 장을 내려 받아 잠들 때까지 들었다. 들어도 들어도 이 세상의 음악들은 끝이 없었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브라질로, 브라질에서 독일로 성큼성큼 땅덩어리를 옮겨 다니며 그렇게 게걸스럽게 음악을 들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살자, 나는 음악 듣는 것을 참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글쓰기는? 너무 싫었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글 같은 거 죽을 때까지 안 쓰고 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 말고도 글 쓰는 사람들이 세상에 공기처럼 흔한데 굳이 나까지 글을 쓸 것까지는 없었다. 책방에 쌓여 있는 산더미 같은 책들에 내 이름이 박힌 책 하나를 보탤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라도 쓰고 싶으면 쓰게 되겠지. 아니면 말고. 그렇게 나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목욕 시키던 아이까지 버리게 되었는데, 그건 아이를 키울 힘이 조금도 없었던 엄마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었다. 더는 글쓰기를 깊이 생각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지고 밥맛도 돌아왔다.
답은 간단했다. 나는 이야기 읽는 것과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둘은 돈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 둘을 하기 위해, 그리고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서도 돈을 벌어야 한다. 이상 끝.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까? 나는 임용고사를 거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사립 중고등학교에서 기적처럼 나를 국어 선생으로 데려다 쓰는 상상을 했다. 얼마나 좋은가? 사립학교 국어 선생님, 즉 정규직 공무원! 여자들이 줄을 서는 안정된 직장! 일등 신랑감! 죄다 개 같은 소리였지만 너무나도 달콤한 상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학교는 내게 감옥처럼 보일 뿐이었다. 남자 선생님들은 기간제 선생들에게 열심히 하면 정교사 될 수 있으니 힘내라고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자 선생님들은 둘씩 셋씩 모여 앉아 드라마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교과서는 내가 왜 이 따위 것을 아이들에게 억지로 떠먹여 줘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왜 시간 맞춰 학교에 와야 하는지,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고 귀걸이를 달거나 화장을 하면 안 되는지, 왜 수업 시간에 자면 안 되고 껌을 씹으면 안 되는지, 왜 쉬는 시간은 10분밖에 안 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정교사이고 전교조 조합원이라 해도 국가와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만들어 낸 이 거대한 감옥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토론식으로 수업을 한다고 해도, 수업 시간에 광주 항쟁이나 제주 4.3 학살을 이야기한다 해도, 아이들을 우르르 한 곳에 몰아넣고 아이들의 생각에 바탕을 두지 않은 무언가를 억지로 쑤셔 넣는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아이들은 점심시간에 어떤 반찬부터 먼저 집어먹을지 자유롭게 고를 수 있을 뿐 그거 말고는 학교에서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어른들끼리 모든 것을 정하고 모든 것을 막는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2011년 12월이었다. 그때도 나는 어느 중학교에서 기간제 국어 선생 노릇을 하고 있었고 기간제로는 드물게 담임까지 맡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1학년 꼬맹이들과 씨름을 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내가 맡은 반이 학교에서 가장 막 나가는 ‘막장’ 반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학교 주먹대장인 덩치 큰 여학생이 하나 있었고 그 여학생의 그늘에서 다른 친구들을 벗겨 먹는 몹쓸 남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 둘은 내 말도, 학년주임의 말도, 상담교사의 말도, 교장의 말도, 부모님의 말도, 세상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학교에 있는 시간보다 사회봉사시설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저 녀석들에게 필요한 건 학교도 공부도 아니고 봉사활동도 아닌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돈이 필요한 기간제 교사 따위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수업 말고는 없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밥 먹고 교무실에 돌아와 이 닦을 채비를 하는데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컴퓨터로 메시지가 왔다. 우리 반 주먹대장에게 빌붙어 사는 그 남학생이 자꾸 학생 식당에서 망나니짓을 하는 바람에 너무 힘드니 제발 좀 ‘엄격’하게 ‘지도’해 달라는 어느 여자 선생님의 메시지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답장을 보내니 금방 기다란 넋두리가 돌아왔다. 급식지도 선생님에게 버릇없이 굴고, 다른 아이들이 밥을 못 먹도록 괴롭히고, 다 먹은 식판을 치우지도 않고 도망가고, 한 마디로 식당을 손아귀에 쥔 불량배처럼 군다는 것이었다.
담배 피우는 아이들을 잡기 위해 빨리 학교 화장실들을 둘러보러 나서야 했던 나는 짧게 고민했다. 이 녀석은 며칠 뒤면 다시 봉사시설에 들어간다. 나는 그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이 학교와 계약이 끝난다. 그 녀석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놔두면 다른 아이들이 또 두들겨 맞고 상처를 받는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녀석의 몸에 손을 대서 ‘공포’를 심어 주는 것이 전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게 최선이다. 나는 그때까지 어느 학교에서든 아이들의 몸에 손을 대 본 적이 없었다.
수업을 다 끝내고 교실에 와 보니 아이들은 집에 가기 위해 가방을 싼 채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교실 뒤로 가서 플라스틱 빗자루 하나를 들고 왔다. 그 녀석의 이름을 불러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엎드려. 오늘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 다 들었다. 너는 네가 지금 왜 맞는지 알 거야.
나는 키도 덩치도 크다. 훅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도록 녀석의 엉덩이를 빗자루로 세게 후려쳤다. 녀석은 다섯 대를 넘기지 못하고 옆으로 뒹굴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아무리 막 나가 봤자 아직 중학교 1학년이었던 것이다. 교실은 꿀꺽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빗자루를 내던지고 나서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청소를 시키고 교무실로 돌아와 학년주임 선생님에게 가서 방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학생을 함부로 때릴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문제가 된다면 전부 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학년주임은 내 어깨를 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요. 걔는 더 맞아야 정신 차립니다.
그 순간 알았다. 최선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최악이었다는 것을. 두들겨 패는 것 말고 분명 다른 방법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나는 그날 밤 집에 돌아와 혼자 소주를 들이부으며 이제 다시는 학교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학교는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었고 나는 아이들을 위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학교에 가서 돈을 버느니 차라리 굶어 죽기로 했다.
그 이듬해인 2012년, 나는 서울에 있는 어느 대안학교에서 일하게 되었다. 말만 대안학교지 실은 얼마나 많은 갈래로 나뉘는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정부 지원을 받는 ‘특성화 고등학교’부터 돈벌레들이 만든 ‘귀족형 사립학교’까지 요즘은 죄다 대안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내가 일하게 된 곳은 지역 청소년수련관에서 운영하는 대안학교였다. 학교를 꾸려 가는 돈이 서울시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처음엔 전혀 몰랐다. 일반 학교가 아닌 대안학교인 만큼 뭔가 좀 다르겠지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다.
그곳의 우두머리는 황 아무개라는 사람이었다. 십여 년 전에 처음 그 대안학교를 만들고 이래저래 서울 지역 대안교육 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는 작자였다. 나는 대안학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나와 조금이라도 비슷할 줄 알았다. 이 세상을 온통 뒤덮고 있는 힘센 논리들에 맞서 ‘대안’이란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면 나와 뭔가 통하는 것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황 아무개는 그런 내 생각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그는 어려운 말로 하면 ‘실적주의자’에 ‘관료주의자’였고 쉬운 말로 하면 ‘개자식’이었다. 교무실에 쓱 들어와서는 “과로사할 각오를 하고 일하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인간이었다. 아랫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라고 말하면서 정작 마지막 갈무리는 자기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었다. 어디서 돈이 나와 이 학교가 굴러가는지를 기억하라고, 학생들과 마음대로 지낼 거면 너희들 돈으로 하라고, 그게 아니면 무조건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교사들에게 대놓고 말하는 인간이었다. 청소년수련관 안에서 황 아무개의 말은 곧 법이었고 그 법을 지키지 않으면 수련관을 나가야 했다. 내 눈앞에서도 황 아무개의 마음에 들지 못한 선생님 하나가 잘려 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서울 지역 대안교육 운동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건 참 좋아했다. 나는 그런 인간이 대안교육이 어쩌고저쩌고 입에 올리는 것을 보며 저 인간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한국의 대안교육 운동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황 아무개에 짓눌려 기계처럼 일만 해야 했던 다른 선생님들과도 잘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받은 돈은 전에 다니던 일반 중고등학교에서 받았던 돈의 딱 절반이었다. 더구나 날마다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다. 그곳이 내가 바랐던 대안학교였다면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모든 것이 일반 사립 중고등학교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교사가 짠 시간표를 아이들에게 들이대는 것은 일반 학교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황 아무개가 허락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아이들을 어떻게든 ‘올바른’ ‘건전한’ ‘깨어 있는’ 청소년으로 만들어야 했지만 아침마다 술 냄새 풍기며 건들건들 학교에 오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보기에 ‘싫증이 날 때까지 막 살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공부하기 싫다는 녀석들 붙들고 왜 검정고시 문제집을 풀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인간 황 아무개도 싫었고 그가 지껄이는 허울뿐인 대안교육도 지긋지긋했다. 아이들이 막상 대안학교를 졸업해 스무 살을 넘고 나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놀랍게도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다. 좋은 데 취직하면 축하해 주고, 놀고 있으면 어서 길을 찾아보라고 다독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내 생각에 그건 대안교육이 아니라 그냥 덕담이고 좋은 말씀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나 프레카리아트(불안정 노동 종사자)가 될 게 뻔한 아이들 데려다 놓고 직업 교육이니 몸 활동이니 마음 활동이니 변죽만 울리는 건 내 눈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다. 교사는 아이들의 삶을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또는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그 대안학교에서 그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닥쳐 온 행사만 잘 치러 내면 그걸로 끝이었다. 행사 하나 마치면 모두들 저절로 얼싸안고 울먹이게 되니까.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버스를 타고 청소년수련관으로 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흥건해진 눈가를 손으로 가리고,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목구멍을 꾹꾹 눌러 삼켜야 했다. 더는 이렇게 살기 싫었다. 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야 알았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글을 쓰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을. 미치도록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을. 기타맨 형님을 비롯한 르포문학모임 사람들이 못 견디도록 그립다는 것을. 버스에서 내려 눈물을 닦고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돌아가자.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살았던, 글을 쓰며 날밤을 새워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던 그 시절로 가자.
그렇게 나는 그곳을 깨끗이 그만두었다. 그리고 막상 그만두고 나니 가슴속이 텅 비어 버렸다. 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알고 보니 죄다 껍데기였던 것이다. 대안학교? 대안교육? 청소년의 삶? 청소년의 미래? 경쟁을 반대한다고? 대안적인 가치를 추구한다고? 그런데 고작 그 꼴이야? 일반 학교보다도 못한? 왕 하나가 다스리는 왕국이지 그게 대안학교야? 정작 아이들도 하기 싫어하는 활동들이 무슨 놈의 ‘대안교과’야? 다른 대안학교들도 다 똑같은가? 세상이 원래 다 이런 거야?
이제 내가 대학 전공을 팔아먹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일반 학교에서도 대안학교에서도 나는 제대로 버티지 못했고 대신 내 속에 있던 무언가가 와장창 깨져 나가기만 했다.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먹으려면 어디에서든 비슷한 것을 견뎌야 했다.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였다.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다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무슨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고, 글쓰기를 어디까지 고민하다가 집어치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글쓰기라는 것을 깨달은 이상 다시 글이 쓰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푹 익은 열매가 나무에서 저절로 툭 떨어지듯, 내 속에서 무언가가 무르익는다면 분명 나도 모르는 사이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새로운 고민들이 머지않아 내 속에서 몽글몽글 꼴을 갖추어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다.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글 쓰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었던 그 시절에도.
그렇다면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기 전까지 무얼 하면 될까? 어디든 들어가 돈을 벌면 되었다. ‘어디든’이 중요했다. 진보니 민중이니 뭐니 번지르르한 말로 꾸민 곳들부터 아예 그렇게 꾸밀 것도 없이 한눈에 봐도 꼴통만 모여 있는 곳들까지 나는 두루 이력서를 보냈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이제는 면접관들의 입맛에 맞게 온갖 거짓말을 척척 지어낼 줄도 알게 되었고 자기소개서에 오직 진실만을 담으려 애를 쓰는 유치한 짓거리도 더는 하지 않았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었고 빚 갚을 돈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잊었다.
가끔씩 기타맨 형님 생각이 났다. 형님이 술자리에서 들려주던 노래들이 갑자기 떠올라 내 바짓가랑이를 잡는 날이 있었다. 칼라TV는 두어 번 자리를 옮겨 다닌 끝에 합정동 어느 땅 밑 으슥한 곳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고 했다. 노동당(당시 진보신당) 당사 건물 코앞이라고도 했다. 이메일이나 손전화 문자를 통해 안부를 물어보면, 형님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면서도 싱싱했다. 칼라TV 활동가들은 하나 둘 떨어져 나가 이제 셋밖에 남지 않았고 노동자들이 개처럼 두들겨 맞는 세상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몇 년씩 뉴스를 보지 않고 살던 나는 다시 조금씩 뉴스를 챙겨 읽으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현장에서 아직도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단 말야? 재능교육, 콜트 콜텍, 기륭전자, 쌍용자동차 등등 내가 오래 전 찾아가 글을 썼던 현장에서 여전히 노동자들이 버티고 앉아 투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현장에 버티고 있었던 건 기타맨 형님과 칼라TV도 마찬가지였다.
이력서를 아무리 뿌려도 어느 한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던 어느 날, 오랜만에 듣고 싶어서 형님에게 노래 녹음한 거 있으면 파일로 하나만 보내 달라고 했다. 형님은 뭐가 듣고 싶은지 물었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곡 이름을 댔다.
7.
걱정하지 마 어차피 잘 안 될 거야
신경 쓰지 마 잘 될 턱이 없잖아
그래도 우리 삶엔 가끔은 환한 날 오겠지
그래도 우리 삶엔 가끔은 볕들 날 오겠지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어차피 잘 안 될 거야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잘 될 턱이 없잖아
기타맨 형님의 노래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도 형님의 얼굴은 그냥 무덤덤했다. 나는 무대로 뛰어 올라가 사람들 앞에서 형님의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이렇게 소리치고도 싶었다. 이거 봐요. 어차피 잘 안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툭툭 내뱉는 사람치고는 너무 태연한 얼굴이잖아요? 하지만 어쩌나. 어떤 얼굴로 부르든 기타맨 형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전자 기타 한 대로 녹음한 파일이 이메일로 왔다. 첫 앨범이 나오기 한참 전이었고 기타맨 형님이나 나나 앨범은 꿈도 꾸지 않던 시절이었다. (형님은 꿈 정도는 꾸었을 수도 있다.) 어느 눈 먼 사장님이 내 이력서를 보고 전화를 걸어 주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방에 틀어박혀 형님의 노래를 들었다. 걱정하지 마. 잘 될 턱이 없잖아. 오랜만에 듣는 형님의 노래는 형님과 처음 알고 지내던 시절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억 속에서 하나 둘 불러냈고, 처음엔 부끄럽고 거북해서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들에 나는 그렇게 둘러싸였다. 그 많은 깃발들. 농성장들. 민주노총이라 적힌 조끼들. 단결투쟁이라 적힌 현수막들. 전경들. 방패들. 눈물과 울음소리들. 짓밟힘과 부서짐. 무지함과 흉악함. 괴물들. 그러나 노랫소리들. 눈빛들. 손들. 왁자한 웃음소리들. 술자리들. 볼펜으로 정신없이 갈겨쓰던 수첩과, 누르는 대로 쉼 없이 찰칵이던 사진기와, 새벽까지 잘그락거리며 두들기던 자판과, 글자로 까맣게 채워지던 모니터와, 현장에 갈 때마다 꿰어 입던 옷들과, 신발들과, 귓가에서 불던 바람 소리와, 집회 무대를 비추던 조명들과, 끝내 다가가지 못하고 도망치던 내 모습과, 내가 없앤 담배와, 빈 소주병과, 창밖을 비추던 가로등과......
하지만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그 모든 것들은 어디론가 멀리 달아나 있었다. 글을 쓰고는 싶었지만 무슨 글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몇 군데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러 가면 면접관과 아무 뜻도 없는 이야기만 나누다가 쫓기듯 집으로 돌아왔다. 같이 일해 보자고 손을 내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경력도 없고 스펙도 없고 내세울 건 학벌뿐인 30대 남성을 대체 누가 월급 주며 먹여 살릴까?
통장이 다시 바닥을 드러냈고 못 낸 공과금들도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막노동이라도 해야 할까 싶었지만 추운 겨울이라 일거리도 없을 것 같았다. 방에 있는 책들을 좀 팔아치우니 연락 온 곳에 면접 보러 갈 수 있는 차비쯤이 생겼다. 내가 이렇게나 무능한 인간이었나? 내가 밥벌이를 할 수 있는 곳이 이렇게 없나? 술을 먹고 싶어도 술값이 없으니 아주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개똥은 약에라도 쓰지 나는 정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아프게 다가왔다. 술? 술은 사람들에게 얻어 마시면 되었다. 가끔씩 칼라TV 사무실에 찾아가면 기타맨 형님은 없는 살림에 소주 한 병과 새우깡 한 봉지라도 내게 쥐여 주었다. 내가 술에 잔뜩 취해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고 웅얼거리면 형님은 지랄하지 말라고, 너는 겁쟁이라서 절대 못 죽는다고 코웃음만 쳤다. 그럴지도 몰랐다. 정말 자살하려는 사람은 자살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전에 이미 죽어 있을 테니까.
이 세상을 등지려는 생각이 싹 걷힌 건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대학 후배들과 술을 마시다가 얼마 뒤 결혼한다는 남녀 후배의 여의도 신혼집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남들이 살아가는 대로 꼴을 갖추기 시작하는 후배의 집안을 보니 갑자기 술맛이 뚝 떨어졌다. 부러움이었는지 거북함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그 감정 때문에 나는 몇 잔 마시지도 않고 그 집을 나왔고 어떻게든 인천 쪽으로 길을 잡기 위해 여의도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새벽 세 시가 넘은 어두컴컴한 광장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한겨울 밤이었지만 이미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그리 춥지 않았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에 맞춰 널찍한 광장 한가운데 서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되는 대로 팔다리를 휘저었고 마구 엉덩이를 흔들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시간이 얼마가 지났을까. 그렇게 한바탕 시원하게 춤을 추고 나니 속에 얹혀 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간 느낌이었다. 나는 휘파람까지 불며 신길역 쪽으로 걸어갔고 동틀 무렵 집에 들어가 쓰러지듯 잠들었다.
다음날 오후에 잠에서 깨어나니 더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밤중에 광장에서 덩실덩실 막춤을 추듯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몸 가는 대로, 내가 뭔가를 원할 때 바로 그 뭔가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내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을 테니. 나는 무엇을 해도 되었고 그 어떤 것을 꿈꿔도 좋았다. 기타맨 형님의 노래처럼 어차피 잘 안 될 테니까. 그걸 똑똑히 알고 있으니까.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은 사라져 있었다. 살아가는 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찔끔찔끔 글이란 걸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든 존재하지 않는 것이든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을 붙잡아 글로 옮겼다. 옛날의 손맛이 아주 조금씩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2013년이 되자마자 나는 어딘가에 일을 나가게 되었는데 그곳 이야기는 길게 하고 싶지 않다. 서울 말고 다른 곳에 있는 대안학교였다. 황 아무개가 있던 곳을 뛰쳐나오며 일반 학교든 대안학교든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번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러고는 더 큰 상처를 입고 몇 달 만에 그곳에서도 도망쳤다. 그곳 사람들은 나 자신을 그곳에 맞게 뜯어고쳐야 한다고 늘 이야기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라고, 마음속에 있는지 없는지 나조차 알 수 없는 것을 끄집어내야 한다고 하며 내게 이러저러한 사람됨을 끼워 맞추려 했다. 여의도 광장에서 한밤중에 춤을 췄더니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니까 다들 나를 미친놈 바라보듯 보았다. 더 늦기 전에 그곳에서 도망쳤기 망정이지 조금만 더 머물렀다면 나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보기 싫게 망가졌을 것이다. 도저히 그곳으로 출근할 수가 없어 지하철을 바꿔 타고 무작정 찾아간 곳이 바로 칼라TV 사무실이었는데 우연히도 그 대안학교의 대표교사가 기타맨 형님이 야학에 있던 시절 알고 지내던 후배였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얄궂다.
그 다음으로 있었던 곳은 더 짧게 이야기해야겠다. 최악이었다. 나는 그곳을 거치며 ‘진보’나 ‘민중’, ‘노동자’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이들이 더 싫어졌다. 그곳 사람들은 언제나 속 내용보다 겉모습을 어떻게 더 맵시 있고 화려하게 꾸밀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름값 높은 글쟁이들의 책만 읽었고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사업에만 온 힘을 다했다. 이제 막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을 떠 뭔가 좀 새로운 목소리를 들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공간이었고 바로 그런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우려내는 조합비로 버텼다.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보다 그냥 아무 일이나 시키는 대로 하는 머슴을 바랐는지 그들은 나를 이메일 한 통으로 간단히 잘라 버렸고 나는 사무실 앞에서 1인 시위를 할지 말지 한동안 고민하다가 그들이 이 바닥에서 틀어쥐고 있는 이름값이 나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비싸다는 사실을 떠올리고서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그들은 두어 달에 한 권씩 잡지도 내며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며 좋았던 점도 있었다. 사무실이 합정동에 있어서 나는 일이 끝나면 기타맨 형님이 있는 칼라TV 사무실로 가 술을 퍼먹을 수 있었다. 앨범을 낼 거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나는 낄낄거리며 형님을 놀렸다. 그 얘기 처음 나온 게 대체 언제 일이에요? 나이 마흔 넘었는데 앨범이라도 한 장 남겨야 나중에 기타 레슨이라도 하며 먹고살지 하며 형님은 쓰게 웃었고 나는 앨범 나오면 꼭 글 하나 써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정말 앨범이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월급이랍시고 받았던 돈으로 나는 글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어느 모임에서 전화상담 노동자 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회사가 계약직 직접고용을 하는 척하면서 그분을 파견직으로 고용한데다가 나중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고해 버렸다는 사연이었다. 아직도 복직 투쟁을 하고 있다는 그분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기로 한 나는 며칠 동안 발품을 팔며 자료를 모으고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땄다. 그리고 꾸역꾸역 아주 긴 글 한 편을 지어 그분에게 보내드렸고 참세상에도 넘겼다. 잘 쓰든 못 쓰든 나는 아직 글이란 걸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정말 오랜만에 확인한 것이다.
그곳을 그만두고 나서도 술 생각이 나면 합정동 칼라TV 사무실에 놀러가 영상 편집하는 기타맨 형님을 붙들고 술을 마셨다. 르포문학모임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아무도 없는 좁다란 사무실 안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연주가 어쩌니 목소리가 어쩌니 수다를 떨었다. 가끔씩 기타맨 형님이 이번 앨범에 실을 거라고 들려주는 노래들이 있었는데 예전에 술자리에서 통기타 반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가지런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들을 때마다 놀랐다. 내가 노래를 못 부르니 후배들 좀 참여시켰지. 매끈한 목소리로 부르는 형님의 노래들은 거지 옷을 왕자 옷으로 바꿔 입힌 것처럼 아예 다른 노래가 되어 더없이 좋은 술안주가 되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올 때까지 나는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집에서 빈둥거렸고, 기타맨 형님은 앨범 작업에 몸도 마음도 푹 담그기 위해서였는지 요즘은 현장에 잘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앨범은 대체 언제 나와요? 내가 물을 때마다 형님은 올해 안으로 낼 거라며 씩 웃기만 했다. 형님처럼 나도 글쓰기든 일자리든 더는 발 동동 구르며 마음을 졸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했다. 나쁜 놈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착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자리면 더 좋고, 아니면 말고. 그리고 월급쟁이로 돌아가게 된다면 꼭 글 작업을 다시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내가 현장을 떠나 있던 사이 나 말고도 적잖은 글쟁이들이 현장을 찾아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많이 알려져 있는 투쟁 사업장마다 르포를 쓴다는 글쟁이 한 명쯤은 붙어 있었다. 내가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나 대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도 예전과는 다른 작업을 하고 싶어졌다. 이미 책으로 나왔거나 누군가가 취재하고 있는 잘 알려진 현장 말고 아직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현장,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기록하는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예전처럼 일주일에 서너 편씩 헐레벌떡 써 내지 않고 더 긴 시간을 들여서라도 더 진하고 깊은 무언가를 담은 글을 쓰고 싶었다. 나 말고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쓰지 못하는 그런 글. 기타맨 형님의 노래처럼 누군가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런 글. 먹고사는 데 바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뾰족한 발톱 하나 박아 넣는 그런 글.
근데 그런 글을 죽을 때까지 쓰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신경 쓰지도 않는다. 쓰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 쓸 수는 없으니 쓰고 싶어지면 어떻게든 쓰면 되는 것이다. 쓰다 보면 뭔가 그럴 듯한 것이 나오게 될지 누가 알까? 우리 삶에 가끔은 환한 날이 올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 때문에 내가 더 글을 써도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글쓰기를 집어치웠었다. 그럼 지금의 나는 전보다 좋은 사람이 되었나? 아니다. 더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또 다시 글을 쓰겠다고 나선 것은,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일부러 쓰지 않는 것도 어떻게 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쓰고 싶으니까 쓴다. 게다가 내겐 참세상의 ‘글쓰기 삶쓰기’라는 꼭지도 있다. 돈 한 푼 못 받아도 상관없다. 글을 쓰는 시간 자체가 내게는 보상이기 때문이다. 다만 무엇을 쓰든 가짜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에서 나는 예나 지금이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 속에 엉겨 있는 냄새 나는 것들을 글로 풀어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거짓말을 쓰고 싶진 않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지껄이게 되는 거짓말을 내가 똑똑히 짚어 낼 수 있을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바로 그게 문제인 것이다.
기타맨 형님이랑 술을 마시며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형님이라면 내게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가짜를 쓰는 것 같다고? 그럼 너의 글쓰기는 거기까지인 모양이지. 앞으로 내가 할 일은 나의 글쓰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다. 그걸 대체 어떻게 할 거냐고? 어떻게 할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알고 있다. 쓰는 것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추석이 지나고 나자 대머리 살인마가 총칼을 들고 일어선 12월 12일에 첫 앨범의 음원이 나올 거라고 기타맨 형님이 알려왔다. 21일에는 앨범 발매 기념 공연도 있을 거라고 했다. 그즈음 나도 새 일자리를 구했다. 제법 큰 시민단체의 간사로 운 좋게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미 이런저런 개 같은 일들을 여러 곳에서 겪고 난 뒤라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근무 조건이나 그곳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것이 마음에 쏙 들어 처음엔 많이 놀랐다. 이런 곳이라면 오래오래 즐겁게 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송년회까지 어떻게든 버텼고 그곳에서 얼굴 해사한 여자 분을 만났으며 옷을 잃어버렸다 되찾은 뒤에 기타맨 형님의 공연을 보러 ‘살롱바다비’까지 온 것이다. 곡 하나하나에 형님과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서려 있었고, 무대 위에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형님은 아마 정신이 없었겠지만 나는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노래를 들으며 그 시간들의 갈피갈피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8.
어디라도 좋아요
당신은 외로운 별 아닌가요
아니 아니 아니에요
나는 그저 탐욕스런 소년이지요
수화기에 입을 대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어요
금은보화 나와라 뚝딱
녹음 짙은 숲속을 둘이 같이 걸어요
공연 일주일 전이었다. 세밑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하루가 비어 냉큼 칼라TV 사무실로 놀러가 다 만들어진 음원을 들려달라고 졸랐다. 기타맨 형님은 내 머리를 툭 치며 음원 나왔으니 그거 사서 들으면 되지 않느냐고 툴툴거렸지만 곧 노래들을 틀어 주었다. 나는 캔맥주 하나에 소주를 섞어 마시며 노래를 들었고 딱히 안주가 필요 없이 연방 술을 들이켤 수 있었다. 그만큼 노래가 좋았기 때문이다. 야, 이거 죽이게 뽑혔는데요? 형님은 별 말이 없었지만 아마 속으로는 은근히 좋아했을 것이다.
근데 앵콜은 뭘로 하실 거예요? 다음 주에 있을 공연 이야기를 하다가 기타맨 형님에게 불쑥 물었다. 앵콜? 글쎄. 근데 앵콜 신청이 있어야 하지. 나는 킥킥거리며 말했다. 에이, 왜 그래요. 선수끼리. 이왕 앵콜 하실 거면 ‘금자탑’으로 해 주세요. 형님도 고개를 끄덕였다. 금자탑? 좋지. 금자탑은 형님이 만든 노래는 아니지만 나도 형님도 무척 좋아하는 노래였다. 전자 기타 한 대만으로 연주해 녹음한 금자탑을 형님은 가끔씩 내게 들려주고는 했다. 멜로디 진짜 예쁘지 않냐? 네, 맞아요.
이번 공연에서도 금자탑은 앵콜로 나온 몇 곡들 가운데 하나였다. 기타맨 형님은 내가 일주일 전에 해 놓은 ‘앵콜 신청’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공연장을 빠져 나가자 형님은 어머니와 함께 무대에서 사진을 찍었다. 형님도 가끔씩 지나가는 말로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고, 이게 대체 사람 사는 거냐고 마흔 넘은 아들을 아직도 구박하신다고 하는데 내겐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직도 내 어머니는 너 그런 데 다니면서 결혼은 어떻게 할래, 나중에 애는 어떻게 낳고 학교는 어떻게 보낼 거니 등등 줄줄이 풀어내시지만 적어도 방안에 틀어박혀 빈둥거리지는 않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를 기특하게 여기신다. 나는 내일 일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기에 결혼이든 뭐든 아직 멀고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어머니에게 나 인생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고 안겨드릴 수 있는 뭔가를 하나쯤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집 한 채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손녀 손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기껏해야 내 이름 박힌 책 한 권쯤이겠지? 하지만 제정신 똑바로 박힌 편집자라면 내 글들을 책으로 묶겠다는 미친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으니 어머니를 생각하면 죄송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어머니와 나란히 서서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 기타맨 형님을 보며, 아마 형님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형님이 조금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을 찍고 나서 형님이 내게 물었다. 공연 어땠냐? 나는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듯 고개만 끄덕거리다가 짧게 한 마디 했다. 좋았어요. 그리고 덧붙였다. 나도 책이나 하나 낼까 봐요. 기타맨 형님은 피식 웃었다. 야, 낼 글이 있어야 책을 내지. 나도 맞받았다. 요새는 돈만 있으면 다 책 내던데요 뭘.
공연 뒤풀이 술자리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만 바글거렸다. 나는 어제와 오늘에 걸쳐 무척이나 피곤했던지라 소주 한 병만 비우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기타맨 형님을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9.
처음 생각대로라면 공연 이야기를 다 쓴 여기서 이 글을 끝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과 경찰들은 기타맨 형님과 나를 가만히 쉬게 놔두지 않았다.
다음날인 12월 22일 일요일, 미처 꺼 놓지 못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 여섯 시였다. 손전화를 만져 소리를 끄고 버릇처럼 뉴스를 검색해 흐릿한 눈으로 훑었다. 민주노총 본부에 공권력 진입. 잠이 확 달아났다. 경향신문사와 민주노총이 있는 건물 주변은 지금 쑥대밭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민주노총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지금 가도 내가 다다를 때쯤이면 모든 것이 깨끗이 치워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서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한 시쯤 눈을 뜨니 방안이 노란 햇빛으로 환했다. 손전화를 더듬어 찾아 다시 뉴스를 검색했다. 전교조 위원장 연행. 경찰은 철도노조 지도부 검거에 집중. 아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기타맨 형님의 페이스북으로 들어가 보았다. 공연 영상 편집하다가 소식 듣고 카메라 들고서 민주노총으로 출발한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옷을 꿰어 입고는 밥 먹고 나가라는 어머니의 말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왔다. 오늘 밤을 거기서 꼬박 새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대문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려는데 웬 여자 분이 맞은편에서부터 걸어왔다. 그저께 송년회 때 만난 그 여자 분이었다. 그분과 나는 서로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는 상대방이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그러다 내가 먼저 물었다. 거기서 오시는 거예요? 내가 말한 거기가 어딘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그 여자 분이 말했다. 네. 내가 또 물었다. 지금은 집에 가시는 거구요? 그 여자 분이 또 말했다. 아뇨. 저는 거기서 쭉 보고 있다가 지금 친구들이 왔다고 해서 데리러 가는 중예요. 내가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 여자 분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따가 뵐 게요. 우리는 그렇게 엇갈려 지나갔고 그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땅 위로 올라가 보니 이미 민주노총으로 가는 길은 전경들 한 무리가 꽁꽁 막아놓고 있었다. (전투경찰은 없어지고 그 자리를 의무경찰들이 대신 채웠다지만 나는 전투경찰이라는 말이 온몸을 단단히 무장하고 나온 저 무리들을 가리키는 데 더 알맞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깃발들이 보였고 ‘박근혜는 하야하라’, ‘철도파업 정당하다’는 손팻말이 보였다. 도로는 몰려나온 사람들로 가득했고 자동차들은 그곳을 지나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택시에서 웬 아저씨 하나가 내리더니 사람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기 환자 있어! 환자가 있다고 이 개새끼들아!
전경들이 밀어붙이는 대로 이리저리 밀려다니던 사람들은 다시 경향신문사 가는 길목에 모였고 거기서 전경들과 오랫동안 밀고 당기기를 했다. 어떻게든 길을 뚫으려는 사람들에게 전경들은 최루액을 쏘았고 몇몇 경찰들이 든 사진기들은 미친 듯이 찰칵거렸다. 전경 버스 수십 대가 인도 가장자리를 빈틈없이 막고 있어 길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기타맨 형님의 페이스북을 보니 형님은 경찰들을 뚫고 귀신 같이 민주노총 건물 안으로 들어가 영상을 찍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와중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아, 정말 이 형님은 미쳤어. 나는 불사신 같은 형님 대신 아까 잠깐 마주친 그 여자 분의 해사한 얼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으슬으슬 추워지니 새로운 소식이 퍼졌다. 이미 민주노총 위원장은 새벽에 사무실에서 빠져 나갔고 체포영장 달랑 가졌을 뿐인 경찰들은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이다. 온종일 경향신문사 건물에서 검거니 뭐니 용을 쓴 게 말짱 헛지랄이 된 셈이다. 경찰에 막혀 아직도 길거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짤막한 기자회견을 했다. 12월 28일을 백만 국민 행동의 날로 정할 것이며, 그날을 기해 총파업에 돌입할 것이며, 철도 노동자 상경 투쟁을 전개할 것이며, 죽기를 각오하고 투쟁할 것이며 등등.
밤 아홉 시쯤 되자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경찰들도 조금씩 물러갔다. 나는 길거리에서 칼라TV 활동가인 크롬을 만나 바로 앞에 있는 커피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흡연구역으로 들어가 담배 하나씩 물고 내가 물었다. 형님은요? 크롬이 말했다. 아직 저 안에 있을 거예요. 크롬은 기타맨 형님이 무슨 수로 거길 뚫고 들어갔는지 정말 대단하다며 낄낄거렸고 일요일인데도 문을 연 거기 식당에서 밥까지 챙겨 먹은 모양이라며 배를 쥐고 웃었다. 나도 함께 웃었다. 크롬이 사준 빵 한 조각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있자니 형님에게 연락이 와서 밖으로 나갔다.
건널목으로 가서 길을 건너니 기타맨 형님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 지하철을 타러 서대문역으로 내려가며 형님은 나와 크롬에게 거기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어떻게 들어갔냐고? 야, 내가 이 짓을 몇 년째 하는데. 9층 식당에서 콩나물국에 밥도 먹었어. 중간에 보니까 보도 완장을 찬 경찰이 종편 방송사 기자들 다 데리고 올라가더라고. 그래서 밑에서 못 올라가고 있는 다른 기자들 내가 다 데리고 올라갔지. 민주노총 위원장실에 내 새 앨범도 두고 왔어. 그거 인증샷을 찍었어야 되는데 갑자기 싸움이 벌어져서......
기타맨 형님이 찍은 <칼라TV 민주노총 침탈현장 잠입취재>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기타맨 형님의 모습이다. 기타를 연주하는 형님과 카메라를 들고 뛰는 형님은 내게 다르지 않게 보인다. 노래를 만들든 짓밟히는 노동자들을 영상에 담든 형님은 잠자는 사람들에게 찬물을 확 끼얹어 깨우고 싶어 한다. 자기 입에 들어갈 밥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고 싶어 한다. 멋진 말솜씨와 넓은 지식으로 거들먹거리기만 하는 인간들의 다리를 걸어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고 싶어 한다. 노래도 영상도 어떤 사람에게는 분명 불편하게 다가오겠지만 늘 좋다고 최고라고 언죽번죽 말하는 나 같은 사람의 뻔한 말을 듣는 것보다 형님은 차라리 불편해 죽겠다는 사람들의 투덜거림을 듣는 걸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형님은 나를 닮았고 나는 형님을 닮았다. 그래서 우리가 아직까지도 만나 함께 술을 퍼먹고, 나는 지난해 세밑부터 갑오년 새해 첫날인 오늘까지 이 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10.
기타맨 형님의 평전을 쓰려면 나는 형님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 남극으로 가는 비행기 표와 권총을 구할 돈은 그때까지 아껴두어야 할 테니 그 돈으로 술이나 사서 가끔씩 형님과 퍼마시면 될 것이다.
어쨌든 형님, 고마워요. 좋은 음악 만들어 줘서,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게 해 줘서요. 글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글을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이 글을 끝까지 써 내고 나니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같은 게 생겼어요. 더 좋은 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형님이 만드는 노래와 형님이 찍는 영상이 미처 가 닿지 못하는 어떤 것을 내가 붙잡아 글로 쓸 거예요. 아마 그런 글은 나밖에 못 쓰겠죠.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쓸 수 있는 글은 한 줄도 쓰지 않을 거니까요.
어제 박근혜 대통령 사퇴와 특검 실시를 부르짖으며 어떤 한 분이 스스로 몸을 불살랐다고 하네요.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다시 농성에 들어갔구요. 어쩌면 이 추운 겨울은 앞으로 오랫동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형님도 저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열심히 살아있기로 해요. 막상 형님 이야기는 그다지 들어있지 않은 이 글을 형님께 새해 선물로 드리며 저는 이만.
<머리에 민들레꽃을 피운 - 처절한 기타맨 / 곽푸른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