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초의원 및 기초단체장 정당공천제는 유지해도 문제, 폐지해도 문제다.
정당의 책임정치 구현을 기치로 2006년 정당공천제가 도입되었지만, 유력 정당의 공천권은 국회의원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많은 정치지망생들이 국회의원의 눈에 들려고 기를 쓰며 국회의원에게 정치후원금을 낸다. 그리고 영남과 호남처럼 정당 독점이 강한 지역에서는 공천을 받기만 하면 당선된다는 공식이 세워졌다. 물론 중선거구제 도입으로 특정정당이 지역 제도정치권을 독점할 가능성은 다소 낮아졌다. 하지만 줄 세우기와 줄 서기는 여전하다. 국회의원이 행사장에 당도하면 그와 같은 정당 소속의 지방의원들은 마중을 나가 수행한다. 이를 보는 주민들의 마음은 언짢다. “예전에는 거꾸로, 국회의원이 지방의원한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는 회고도 나온다.
책임정치의 구현도 요원해 보인다. 국회의원이 통제하는 범위 밖에서, 많은 의원들은 개별적·구역적 활동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정당의 지역 당원들이 기초의원의 활동을 공유하거나 통제하는 힘도 미약해서 공천제 자체만으로는 정당정치 효과를 살리기가 무척 어려운 형편이다. 한 지역에 복수의 국회의원이 존재할 수가 있는데, 그 지역 지방의회 의원들은 같은 정당이라도 어느 지역인가, 다시 말해 자기 지역구가 어느 국회의원의 지역구인가에 따라서 패가 갈리는 경향이 있다. 이념과 정책과는 무관한 분화다.
진보진영 일각에서 무작정 정당정치를 강조하며 공천제를 찬성하는 건 썩 현명하지 못하다. 주민들 상당수가 공천제에 반대하고 있고, 그들이 가장 우려하는 국회의원의 지역 지배는 금세 눈에 보이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당정치 원론만으로는 주민들과 대화를 풀어나가기도 벅찰 것이다. 최소한 국회의원 공천권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실 “저희처럼 당원민주주의로 상향식 공천을 하면 됩니다”라는 설명도 힘이 없다. 그 반대 방식으로 공천되는 후보와 정당이 훨씬 더 많고 더 크기에 듣는 주민에게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공천제를 폐지했을 때 나타날 폐해도 눈에 선히 보인다. 모 정당 소속 지방의원이 의회를 독식하는 것과 그 정당과 동일 또는 유사한 경향을 가진 무소속 지방의원이 의회를 독식하는 것 사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정당 간판이라도 걸려 있을 때와 달리, 유권자만 정보 부족으로 자신과 맞지 않는 선택을 할 공산이 높다. 공천이라는 문턱이 사라진 결과로 후보가 난립하면 정보 부족은 더욱 심화할 수 있다. 후보 난립은 투표하는 손이 익숙한 이름에게로 가기 쉽게 만들어서 정치 신인에게도 불리하게 작용할 공산이 높다.
더 큰 해악은 국회의원의 힘이 비워진 자리를 토건지상주의나 투기 성향을 보이는 지역 토호들이 장악하는 데서 나온다. 그들은 이마에 아무것도 써 붙이지 않은 채 물밑에서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지원할 수 있다. 그 후보가 당선되어 잘못된 정책을 속속 입안하며 여론의 질타를 받더라도, 숨어 있으면 되고 정 여의치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 대리인을 바꿔버리면 그만이다.
폐지의 내용에서 딜레마도 있다. 입당 자체를 금지할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 전자는 정당에서 활동하는 시민권을 제한하는 셈이다. 후자에도 틈새가 있다. 2002년 기초선거에서 공천제는 없었지만, 후보자는 자신의 당적이나 당직을 이력에 표기했다. 공천제 폐지 효과에 금이 가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주민정당제’를 주창한다. 지역 내에서 주민들이 지역적 사고로 강령을 만들어 정당을 결성하고, 거기에서 기초선거 후보를 공천하는 제도다. 일본의 가나가와네트워크가 대표적인 예다. 한국에도 풀뿌리옥천당이 있었으나, 주민정당이 법제화되어 있지 않아 ‘당’이라는 명칭을 걸었다는 이유로 온갖 고초를 겪었다.
나는 중앙정치의 지방 지배, 국회의원의 공천권 행사를 일소하는 동시에 책임 있는 정당정치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이 이상의 안을 알지 못한다. 지난해 대선에서는 심상정 예비후보가 대구에 왔을 적 이 안을 잠시 꺼낸 적이 있다. 지금 경실련 같은 일부 시민단체와 진보신당 등에서 정당공천제 폐지를 놓고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데, 주민정당제로 합의를 볼 만하다.
그러나 만약 방향이 폐지로 몰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19대 국회 개원 이후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법안들을 살펴보니 몇 가지에서 차이를 보인다. 유승규안과 정갑윤안은 공천제 폐지에 더해 기초의원 중선거구를 소선거구로 바꾸는 것이 골자다. 상대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안은 이재오안과 신의진안이다. 이재오안은 후보자의 정당 가입 자체를 허락하지 않고 광역의원선거에서도 정당공천제를 폐지하는 파격적인 안이다. 신의진안은 비례대표 비중을 10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더욱 확대하여 정당 소속을 표방한 의원이 의회에서 활동할 여지를 두고 있다. 여기서 비례대표의원은 전원이 여성으로 여성할당의 성격을 지닌다.
소선거구제는 개발중심사고를 더욱 부추기며 주민들의 다양한 여론을 반영하기 어렵고 정치신인에게도 턱없이 불리한 제도다. 선거구제는 공천제보다 더욱 현실에 큰 영향을 끼치므로 소선거구제 전환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 정당 활동의 기회를 아예 제한하는 것도, 당적 가진 광역자치단체장을 당적 없는 광역의원이 상대하는 불균형도 걸러내야 할 사항이다. 비례대표제 유지 혹은 확대는, 당적 없는 지역구 의원과 비대칭을 이루긴 하나, 의회 내 다양성 실현을 위해 존속하는 쪽으로 가져가야 한다. 다만 전원 여성할당은 역차별이라 볼 수 있다.
공천제가 폐지되면 앞서 대안으로 거론한 주민정당을 비제도적으로나마, 주민정치조직, 생활정치모임의 형태로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선거법 저촉, 특히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는지 유의해야 한다. 선거 이야기보다는 일상운동이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래의 후보자들이 그런 실험 속에서 육성된다면 공천제 폐지로 놓이는 걸림돌들을 밟고 넘어설 역량도 키워질 것이다. 후보자들도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공동행동을 해야 한다. '무슨무슨 연대'라는 식의 마크라도 박고 있으면, 유권자들에게 성향을 알리기 쉬울 것이다.
공천제가 유지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 나가면? 여기서도 비례대표 의석을 늘리고 소선거구제로의 전환을 막는 것이 핵심이다. 지방의원들 대다수는 공천제 폐지-소선거구제 전환을 지향한다. 전자는 양날의 칼이지만, 후자는 해악만 많을 뿐이다. 공천제 유지-중선거구제 유지를 찬성하는 이는, 공천제는 내주더라도 중선거구제는 절대 내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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