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나서 김소연 선본의 선거평가모임이 두어 달 전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있었고, 두어 주 전에는 철도노조에서 변혁모임의 향후진로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으며, 며칠 전에는 맑스코뮤날레에서 변혁모임의 나아갈 바에 대한 토론이 열렸다.
이 세 곳에 참석한 후 든 고민과 생각을 나누고자 이 글을 적는다. 그 고민을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변혁모임이 추구하는 당은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노동계급 변혁정당’과는 한참 어긋나게 될 것이라는 조심스런 추측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우려이다.
변혁모임은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난한 계급투쟁에 대한 ‘헌신적인’ 지지, 지원활동에도 불구하고,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렇게도 비판했던 ‘노동자주의’의 나락으로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 투사들이 천 명 정도 모이면 당 건설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말은 충분히 다했다. 투쟁의 현장으로 달려가 행동으로 연대하여 당 건설을 이루자”
이런 말로 요약될 수 있는 변혁모임 주요 활동가들의 발언이나, 5대 기조로 반재벌, 반자본주의, 비정규직 철폐를 내거는 것으로 충분한 듯 자위하는 모습, 그리고 곳곳에서 정치강령 관련 논쟁에 대한 역력한 회피 분위기는 이런 우려를 더욱 더 뚜렷하게 해주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대세를 계속 장악한다면, 변혁모임은 세계 당 건설운동사에서 흔히 보아왔던 경제주의적-멘셰비키적 당의 한국판을 재탕할 것이라는 우려가 든다.
마르크스가 얘기하고, 레닌이 실천했던 노동자의 당은 위로부터, 그리고 외부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정치적 강령을 뚜렷이 하기 위한 지난한 사상투쟁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건설될 수밖에 없다.
‘위로부터의 당 건설’이라 함은 당 자체의 정의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당이란 정치적 결사체이지 활동가들의 ‘동지애(?)’로 뭉친 연합 같은 게 아니기 때문에, ‘위로부터’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내용의 일치(그것의 총화로서의 당 강령)로부터 당 건설을 착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정치내용에 대한 구체적 동의에 기초하여, 소수로 시작할지언정 유기적 통일성을 갖춤으로써, 천 명 아니 만 명의 결집체와도 같은 역할을 해 내는 노동계급 전체의 투쟁사령탑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변혁모임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앞서 말했듯이 “이제 논쟁은 충분하다, 현장 속으로!”라는 현장만능주의로 도배되고 있지 아니한가? 정치적 심오함은 학자들의 몫인 양, 정치노선을 명확히 하는 작업은 회피되고 있다. 그저 현장투쟁이 활발히 일어나고 그 현장투쟁들이 전투적으로 상승하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만연해 있다.
혁명 정치의 내용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바로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의 역사를 총체적이고도 이론적으로 분석하여 이를 승화시켜낸 엑기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걸 간단히 말해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런 사회주의 정치이론은 노동자 투쟁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그랬으면 벌써 이 땅은 노동해방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혁명적 의식은 계급투쟁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국제적 실천의 정수를 체현한 당과 계급투쟁의 결합이 불가피한 것이다.
김소연 동지는 포럼세션에서 이같이 말했다. “반자본주의라는 얘기로도 사람들을 모으는 데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사회주의를 말한다면 더더욱 힘들 겁니다. ...그리고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는 전위당을 건설하자는 게 아니에요. 대중정당을 만들자는 겁니다.”
김소연 동지의 말이 맞긴 맞다. 사회주의 정치조직에 가입했다가 국가보안법으로 ‘쓴 맛’을 본 노동자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쓴 맛’이라는 게, 국가권력에 의해서 감옥가고 해고되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도 현장 동료 활동가들로부터 고립되는 것 때문이란 점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의 고립’이라는 것의 정체가 무언가를 따져보자. 사회주의 활동가의 대중 속에서의 고립은 임금투쟁, 단체협상투쟁을 비롯한 각종 현안들은 제쳐두고 ‘딴 짓’하고 있다는 후진적 의식의 반영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평상시 즉, 계급투쟁의 하강기에는 전체 노동계급 중에서 후진노동자층이 다수를 점하게 되며, 이들의 의식을 외면하기 힘든 노동조합 관료들은 대개가 조합주의 의식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고, 이들의 조합주의적 의식을 반영하는 건 사회민주주의 정치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들 조합주의적 의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사회개량주의-사회민주주의 정치를 지향하는 정당에 지지를 보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적 갈등이 격화되지 않아 노동계급의 의식이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시기에, 높은 수준의 의식을 지닌 노동계급의 전위층 즉,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고립은 필연이다. 그런데 그 고립이 두려워 정치노선을 후진적 수준에 방치하겠다는 것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않겠다는 말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변혁모임의 ‘5대 기조’는 그 결과물이다.
강령을 단순화하고 그 수준을 낮추어 더 많은 대중적 지지를 얻어내겠다는 변혁모임의 노선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연대 다함께가 그랬듯이 “문재인을 지지하는 노동자대중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우리는 문재인을 지지한다”와 무엇이 질적으로 다를 것인가? 변혁모임 활동가들의 자기모순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 야당과 독립된 노동자계급후보의 완주! 구속을 각오하는 선거투쟁!’을 내걸었으며, 발제문에서도 변혁모임이 추구하는 정당은 ‘사회주의에 기초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우리는 전위당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고 대중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다”가 과연 양립될 수 있는 것일까?
김소연 동지는 누가 뭐래도 훌륭한 투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훌륭한 ‘노동자 투사’들을 모아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아쉽게도 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 체제에 위협적인 당을 건설해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OECD 자살률 1위, 노동시간 1위, 산재사망자 수 1위의 초과착취 자본주의체제인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며, 노동자로 살아가는 한 우리의 공적 1호는 자본주의 체제일 수밖에 없다. 타깃을 정조준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어설픈 당이 아니라, 제대로 된 당을 만들어야만 한다. 투사동맹이 아니라, “제대로 된” 즉, 세계 노동계급의 역사적 실천의 핵심적 유산을 토대로 과학적/혁명적 강령에 기초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변혁모임의 정당은 또 하나의 실패작이 될 것이 뻔하며, 이는 우리 노동운동의 소중한 자산을 탕진하고, 나아가 “제대로 된” 노동자당 건설을 지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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