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주교구 사제단이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규탄과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주장하는 시국미사를 열었다. 정부와 여당은 시국미사에서 강론한 박창신 원로신부의 ‘연평도 포격, 천안함 침몰’ 발언을 문제 삼으며 연일 맹공을 퍼붓고 있다. 과묵하기로 소문난 대통령까지 나서며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행동들을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총리는 “대한민국을 파괴하고 적에 동조하는 행위”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언제나 그랬듯이, 언론은 양떼몰이 개처럼 정부의 ‘종북몰이’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박창신 신부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고, 이제 여론의 초점은 종교인이 정치에 개입하는 게 적절한지, 사제의 강론내용에 국가보안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 여부로 넘어가는 듯하다.
그런데 이번 시국미사는 여느 종교행사와 달리 열리기도 전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바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는 첫 미사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난 1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유신시대로의 회귀’, ‘독재정부의 귀환’을 소리 높여 외치며 정부를 비판해왔지만, 정작 어느 곳에서도 ‘대통령 사퇴’는 한 번도 공론화된 적이 없었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연이은 노동자들의 자살, 철도 가스 발전 의료 공공부문 상업화, 복지 축소, 진보정당 노동조합 사회단체에 대한 고강도 탄압, 불안정노동(시간제 일자리) 확대 등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부의 실정 속에서도 누구도 정권 퇴진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제단이 입을 뗐다.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그 말을 내뱉자, 정권은 격렬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정권퇴진을 외칠 능력도, 계획도 없는 정당, 몇몇 사제들의 퇴진 요구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화들짝 놀란 정부, 이 모든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국민들. 이번 시국미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태의 본질이다.
박근혜 정부가 지켜야 할 보루 - 대선, 종북몰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선거를 등치시킬 정도로 현대 민주주의는 비밀 보통 평등 직접 투표를 통한 선거 말고는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다양한 사회세력의 토론과 각축, 투쟁을 통한 정치의 구성이 아니라, 선거에 참여해서 졌으면 군말 없이 따르라고 한다. 따르지 않으면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른다. 선거와 법치주의가 현대 민주주의의 실내용이다. 정치계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치인, 선거전문가, 여론조사전문가, 정책전문가들이 뭉친 그룹들이 돌아가면서 집권하는 사실상의 과두제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정권 정당성의 원천은 선거에서 나오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국정원, 군 사이버사령부를 비롯한 국가기관이 대선에 조직적으로 개입해 야당 후보 낙선운동을 한 것이다. 사법부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지만, 국정원장이 대선 개입사실을 인정한 만큼 사법적 유무죄를 떠나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박근혜 정권은 급증하는 복지 요구 속에서 당선되었지만, 이를 실현할 수 없음을 드러냈다. 의지는 있었지만 여건이 따라주지 않은 게 아니다. 적극적으로 가진 자들의 계급적 이해에 맞춰 필요한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로 먹고사는 게 힘들어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정부가 자본을 제어하고 최소한의 복지를 펼쳐낼 생각이 없다면 남은 건 크고 작은 싸움들을 진압하는 것뿐이다. 그런 조직된 폭력에 공권력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게 바로 선거였다. 시국미사 개최에 대해 새누리당 홍문종 사무총장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당선된 정통성 있는 대통령을 부정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미사개최를 비판했었다. 이 발언은 ‘민주적 절차에 따라 당선된 정통성 있는 대통령’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으며 정권은 이 부분을 가장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앞으로 4년 동안 민심을 얻을 가망은 없는 취약한 정권이 국가권력으로서 자신의 정통성마저 의심받는 상황은 반드시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다.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박근혜 정권은 ‘종북몰이’ 카드를 꺼내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실이 하나둘씩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내란을 음모했다는 국정원 발 사건이 터졌다. 연이어 통합진보당 해산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종북교육을 한다던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 덤으로 공무원노조의 정치개입여부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까지. 분단과 남북대결상황이 만들어낸 뿌리 깊은 반공반북주의를 더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종북몰이’는 오랜 기간 동안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함께 진행되었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통일운동을 여타의 운동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분리해내며, 봉건적인 북을 추종하는 집단으로 낙인찍고 깊은 혐오를 만들어내고 있다. 모두들 종북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워 섣불리 나서지 못한 채 정국의 주도권을 정부가 가져간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수그러들지 않고 터져 나온 정의구현 사제단의 ‘정권 퇴진’ 요구에 정부는 경악한 것이며 여당 대표라는 사람이 ‘북한이 반정부 대남 투쟁 지령을 내린 뒤 대선 불복 운동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황당한 발언까지 하게 된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의 정권 정통성 문제 때문인지, 이제는 북의 절차적 비민주성을 규탄하는 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계급적 이해를 들먹이고 있다. 법무부는 통합진보당 해산청구 이유서에서 강령에 적힌 ‘노동자와 민중이 주인 되는 나라가 돼야 한다’가 헌법의 국민주권주의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지난 21일 국회에서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이 “1%에 쏠린 정치권력을 99%에게 나눠주겠다, 이 땅의 민중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자 새누리당 이장우 의원이 “그것이 김일성주의인 거다”라며 야유를 보냈다. 저들의 종북 공세가 단지 대중들의 반북혐북 정서를 이용한 정치공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정권 퇴진’ 요구는 우리의 의지
누군가 ‘정권 퇴진’이라는 구호에서 실현가능성과 능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요구는 구체적인 실현 경로를 찾지 못해 접히기도 하지만 판단의 명확한 근거와 지향만 있다면 어떤 요구는 우리의 의지를 모으는 창구가 될 수도 있다. 저들이 스스로 이야기하는 ‘민주적 절차에 따른 정통성’조차 갖추지 못한 정권, 5년마다 돌아오는 선거가 아니라 매일매일 삶 속에서 주인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가 보기에, 박근혜 정권은 지금 당장 물러나도 아무런 손색없다. 저들이 펄쩍 뛸수록 더욱 소리 높여 외쳐 보자. ‘박근혜 정권 퇴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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