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 2013년 8월 8일, 296일간의 철탑 농성을 마치고 땅을 밟았을 때, 2012년 그 겨울을 함께 이겨낸 유성지회 홍종인, 쌍용차지부 한상균, 문기주, 복기성,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최병승, 천의봉과 함께 술 한잔하기로 했다. 같은 하늘 위에서 우리가 보낸 고공농성일만 6명을 합치면 1200여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2013년 10월 13일, 홍종인 지회장이 이정훈 지회장과 함께 옥천 광고탑에 다시 올랐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죽으면 안 된다’였다. 다리 하나 제대로 펼 수 없는 151일간의 굴다리농성으로 건강도 회복하지 못해 목발을 집고 다녔던 홍종인 동지가 또 다시 하늘을 오르겠다고 생각했을 때 느꼈을 심정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죽고 싶을 정도의 책임감과 절망감에 또 다시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이 느껴져 잠을 잘 수 없었다.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옥천에 올라가 내가 한 짓은 술 먹고 주정 부리며 눈물을 흘린 게 전부였다. 나란 인간은 별로 도움이 안 됐다. 그리고 농성장을 몇 번 찾기도 했지만, 내 문제가 걸리고 이런저런 일들을 시작하고 보니 잠 못 들었던 처음의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잊고 지내다 문득 생각났을 때조차 조금 더 있겠지? 잘 버티겠지? 라는 핑계를 대며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사단이 났다. 홍종인 지회장이 129일 만에 땅을 밟겠다고 했던 것이다. 한편으론 안도감이 들고 또 한편으론 홀로 남는 이정훈 지회장이 생각났다. 내려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올려다본 하늘, 이제 홀로 남은 이정훈 지회장이 내뿜는 담배 연기를 보며 가슴이 무너졌다. 줄담배를 피우며 하늘과 땅을 바라보는 이정훈 동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정훈 동지를 홀로 남겨두고 내려와 딸을 향해 웃어야 하는 홍종인 동지는 또 무슨 마음이었을까? 마음이 계속 복잡했다. 갑자기 밀려오는 무력감.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얼마 후 희망버스가 제안되었다. 154일째 되는 날, 아니 홍종인 지회장이 있었던 171일 굴다리 농성을 합하면 325일째가 되어서야 우리는 유성 동지들의 외침에 처음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유성 동지들은 이렇게 늦게 화답한 우리에게 또 다른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1차 희망버스 출발하기 며칠 전에 유성 영동의 해고자들이 희망버스 조직을 위해 울산을 방문했다. 현대차지부,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현대차비정규직지회 해투위 동지들과 간담회를 진행한 후 지회(해투위 포함), 현대차 현장조직(민투위, 금속연대), 서영호·양봉수 열사정신계승사업회 사람들과 함께 출근투쟁을 했고, 765kv 송전탑 건설 저지를 위해 밀양 1박 2일까지 함께했다.
이날 만난 유성 해고자들은 “민주노조라는 이유로 탄압받는 투쟁하는 노동자”를 알리기 위해 3월 15일 출발하는 희망버스를 앞두고 전국 순회 중이라고 했다. ‘노조 파괴’라는 똑같은 고통을 받은 보쉬전장지회 해고자도 함께 나섰다. 아마 유성 동지들의 그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유성과 보쉬전장 동지들은 부산 일반노조 신라대지부, 풍산 마이크로텍지회, 삼성전자지회 해운대분회, 한진중공업지회, 철도노조 부산본부, 경주 발레오만도지회, 울산 현대차지부/비정규직 지회, 보건의료노조 영남대의료원지부, 대구 상신브레이크지회, 대구지하철노조 해고자, 구미 KEC지회, 공공운수 대전 택시지부, 수자원공사 비정규직 등 현재 투쟁하는 모든 사업장의 목소리를 담았다.
2011년 임단협도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들은 조직력이 복원되고 있기 때문에 복 받은 사업장이라 자랑하며 유성 동지들은 투쟁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마치 그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 우리에게 가슴 깊이 반성하라는 듯 조용히 행동했다.
그 모습은 ‘희망’ 그 자체였다. 홍종인 지회장이 이정훈 지회장을 홀로 남겨두고 내려올 수 있었던 그 믿음과 신뢰를 느꼈고, 자본이 아무리 탄압해도 노동자의 의리와 단결로 민주노조를 다시 세운 그 힘을 배웠다. 이렇게 노동자의 의리와 단결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유성 투쟁이 패배한다면 민주노조에 희망이 있을까? 홀로 남은 이정훈 지회장과 홀로 내려온 홍종인 지회장이 감수해야 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없다. 그래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단언컨대 “유성 투쟁 패배하면 민주노조 무너진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시 5월 10일 2차 유성희망버스가 출발한다. 우리 모두 다시 5월 10일 희망버스를 타자! 그래야 다시 세운 민주노조를 지킬 수 있다. 우리 모두의 서러운 세월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우리의 힘으로 이정훈 영동지회장이 안전하게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자. 민주노총과 금속노조가 먼저 결의하자. 그날 하루만큼은 토요일의 달콤한 휴식을 반납하고 이정훈을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의 희망인 민주노조 유성을 응원하기 위해, 우리 모두를 지키기 위해 옥천으로, 영동으로, 아산공장으로 달려가자고. 노동자민중의 아름다운 연대, 희망버스 운동을 함께 지켜내자고. 우리들의 봄소풍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느냐고. 민주노조운동의 봄소풍을 지금부터 준비하자. 우리들의 분노가, 연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저들에게 보여주자.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