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싸우다 빠지는 집회시위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그날 청년들이 이어간 시위의 모습이 끈질겼고 비타협적이었기에 낯설었고 감동으로 다가왔으리라. 9시 반부터 시작한 4시간의 싸움, 쏟아지던 폭우에 온몸이 젖어도 의기만은 젖지 않았던, 몇 백배 많았던 경찰의 물리력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던 시위대의 모습은 그 자리에 있던 경찰들도 당황하게 만들었다. 기나긴 연설이 언제 끝날까 속으로 시간을 헤아리는 자리가 아니라 ‘세월호를 기억하라’, ‘이윤보다 사람이다’라는 짧은 구호를 반복해 외쳐도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 의지가 ‘청와대에 들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결같았고 흔들림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오죽했으면 경찰들이 “여러분들의 생각은 충분히 전달됐을 테니 이제 집으로 가라”며 길을 터주었겠는가.
▲ 참세상 자료사진 |
앞뒤 재는 투쟁, 길들여진 싸움을 넘어
세월호에 갇힌 300여 명의 목숨이 손도 써보지 못한 채(아니 정확히 정부가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던!) 그냥 수장되는 것을 온 국민이 생방송으로 지켜보며 느꼈던 비애와 비통함은 더 이상 이 탐욕의 이윤체제를 그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비상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일상이 아닌 비상(非常)말이다. 일상적 투쟁방식으로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싸움을 생각하고 있다면 참사의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침몰의 원인이었던 규제완화 폐기조차도 이뤄낼 수 없다. 따라서 기존 운동집단이 해왔던 비슷하고 익숙한 싸움으로 운동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왜 6.10 삼청동 싸움이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가. 비타협적이고 앞뒤 재지 않았던 싸움은 투쟁의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에 있어서도 ‘탐욕의 이윤체제’에 대한 분노, 300여 명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그날 그곳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도 그날의 장면을 찍은 사진에 나타난 사람들의 얼굴에 무엇이 서려있는지, 분명히 볼 수 있지 않은가.
어떤 이들은 말한다. 처음 참여하는 젊은이들이라, 아직 소환장을 받아본 적이 없어 벌금과 법적 대응의 귀찮음을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또는 다음날 직장으로 출근해야하는 생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아니라서 그렇게 싸운 것이라고. 그러나 정말 그런지 물어야 한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틀에 박힌 투쟁’만 해야 한다. 저들은 그렇게 ‘벌금과 48시간 구금’으로 우리를 괴롭힐 것이기에.
그러나 삼청동의 그날 다 잡아가라는 결의로 싸웠던 젊은이들은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들 중에는 여러 번 연행된 경험이 있던 사람도 있었고, 생계를 위해 “석방되자마자 금요일부터 주말 내내 알바를 해야”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들이 의기를 모아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여기서 멈추면, 또 세월호 참사가 잊히고 없던 일로 되는 것이 더 두려웠기 사람들이기 때문일 게다. 단지 철없는 젊은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비슷한 경험은 5월 8일 밤 청운동 사무소 건너편 집회에서도 있었다. <5.8 청와대 만민공동회>를 마치고 청운동 사무소 행진한 사람들이 여의도 KBS에서 청와대로 오는 세월호 참사 가족들을 기다릴 때도 똑같았다. 경찰이 계속 미신고 불법집회라며 해산명령을 하고 연행 경고를 하였지만 사람들은 크게 줄지 않았다. 동요하지도 않았다. 참가자들에게 진행자들이 “연행이 힘든 분들이거나 내일 일이 있거나 사정이 있는 분들은 빠지세요, 미안해하지 말고 주변으로 나가 있어도 됩니다.”라고 수차례 말했지만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남아서 유족들을 기다리며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차분히 말하고 노래했다. 사람들은 그만큼 비통해하고 분노하고 있었고, 그래서 48시간 구금이나 벌금 따위는 그렇게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6월 10일 삼청동도 그랬다. 경찰이 사방으로 막다가 길을 터주면서 해산하라고 했지만 몇 명만 나갔다. 그리고 대열 안에서 누군가 ‘연행될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은 각자 정하고 나갈 사람들은 나가자’고 하자, 오히려 경찰들로 둘러싸인 안으로 사람들이 더 들어가는 진기한 모습이 나타났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청와대 행진
6.10 삼청동 싸움을 얘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추모행진의 방향을 언급한다. 아니 말할 수밖에 없다. 수만 명이 모였으나 그 발걸음은 언제나 쳇바퀴였고 그 발걸음에 함께 하는 숫자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모든 집회와 행진이 같은 무게와 같은 의미를 담도록 기획되지는 않지만 3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의 무게를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분노를 모아내고 투쟁의 수위를 높여가며 정부를 압박하는 운동을 조직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두려워하는 것은 세월호 참사로 인해 정권으로 모든 관심과 비판이 쏠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청와대 행진에 대해 과잉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6월 10일 <6.10 청와대 만인대회>를 하기 위해 61곳 집회신고를 모두 금지할 정도다. 그런데 정부가 두려워하는 일을 빼고 한다면 진짜 싸움이 벌어지겠는가.
어떤 이들은 말한다. 더 많은 사람들과 가기 위해서는 청와대 행진이라는 무리수를 두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왜 추모행진의 숫자가 줄어들었는가. 추모집회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이 한 일이 한 발짝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 참여자들의 발길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청와대 행진이 무리수라는 판단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헌법에 보장된 집회시위의 권리가 왜 특정 지역에서 막히는지, 누가 막는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채 말이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머리로’ 청와대 행진은 무리라고 판단하지만 말고, 더 이상 경찰은, 정부는 우리의 행진을 막지 말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래야 불가능함이 가능함으로 바뀌지 않겠는가. 모든 혁명이 그러했듯이 가능함을 상정했기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4.19혁명 때 ‘이승만 정권이 우리가 거리로 나서면 물러설 거야’라는 가능함을 보고, 재고 나섰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청와대를 향한 발걸음을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이어갈 때, 탐욕의 체제, 이윤중심의 질서에 조금이나마 균열을 낼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 참세상 자료사진 |
세월호 참사 싸움은 우리 모두의 투쟁
세월호 참사 싸움은 이미 탐욕의 체제에 대한 싸움이 됐다. 이것은 세월호 참사 가족들만의 싸움이 아니다. 80년 5월 광주항쟁이 어디 희생자 가족들만의 싸움이었는가. 80년 광주 학살이 보여준 국가권력의 잔인함과 독재권력의 횡포에 맞선 싸움이었듯이, 이 싸움은 세월호 침몰과 참사에서 보여준 생명구조에 관심 없는 국가권력, 오직 기업의 이윤에만 관심이 있는 정부와 체제에 대한 싸움이다. 그래서 분노한 개인들이 각자의 선택으로 싸움을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게다.
그래서 이 싸움은 바디우의 표현을 빌자면 눈부신 전투를 치르는 오만한 귀족적 전사의 싸움이 아니라 긴 시간을 인내하는 익명의 민주주의적인 집단적 병사들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익명의 병사들의 힘은 국가의 야만성이 그/녀들을 삼키는 순간에 드러나듯이 자발적 개인들의 싸움에서 드러나고 있다. 6월 10일 삼청동 그 시간에 있었던 이름 모를 그 젊은이들,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싸웠기에 공기를 바꾸고 시간을 들썩이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민주주의 국가이기에 익명의 병사라는 영웅이미지일 수밖에 없다고 표현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싸움은 명망가 몇 명이 이 싸움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내가 잠 못 들었던 이유
사실 6월 10일 싸움을 마치고 집에 와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단지 감동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라는 생각 때문에 불편했다. 나는 강렬하게 굽히지 않고 삼청동을 떠나지 않고 구호를 외치는 대열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다. 그/녀들을 보조한다는 명목으로 감시활동을 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대열에 들어가서 연행 시 필요한 정보와 권리들을 알려주고 왔지만 허전했다. 함께 그 대오에 있지 않았던 것이 못내 아쉬워서 무엇 때문에 그런 판단과 결정을 했는지 밤새 복기(復棋)해야 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요청 때문만은 아니라, 그 감정과 감동의 근원을 파헤치고 나누고 싶어서일 것이다.
<6.10 청와대 만인대화>를 진행하던 사람들이 연행될 쯤 도착한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사회자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곳을 채운 대다수는 이름 모를 젊은이들이었다. 누군가 이미 말하고 있는데 내가 나서도 되는지, 내가 그/녀들과 함께 싸워도 되는지, 연행된 사람들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지 이리 저리 쟀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싸움을 내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언제나 익숙했던 정해진 사회자와 주도자가 아니면 나서지 않았던 길들여진 싸움의 경험들이 내 발목을 잡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시위대 주변에 있었던 나이든 시민들이 함께 하지 못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낯선 싸움의 방식에 어리둥절해 하던 시민들이 싸움의 마지막에 호송차 앞에 섰다. 다행이다. 젊은이들의 싸움으로 끝날 뻔한 것을 우리들의 싸움을 바꾸었다. 결국 연행됐지만 그/녀들은 멋있었다.
이렇게 소회를 쓰는 이유는 다시 그/녀들이 서있던 위치에 함께 서서 그 빛나는 순간들을, 역사적 장면들을 함께 하고 싶어서이다. 그러니 그날 함께 하지 못해 서운했던 이들이여, 다시 청와대로 가서 그 시간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