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을 제기한 게 2010년 11월 3일이었으니 3년 10개월 만에 겨우 1심 판결이 나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승소판결이란 점과 임금이나 손해배상청구금에서 일부 인정받지 못했으나 파견관계는 모두 인정돼 실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에 완승했다.
이번 소송처럼 1심 판결이 3~4년 정도 걸리는 사건은 극히 드물진 않다. 그런 경우는 이런저런 이유로 재판이 상당기간 중단돼 오래 걸리는 것이다. 이 사건처럼 변론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됐는데도 1심만 4년 가까이 걸린 사건은 유래를 찾기 힘들다.
이 글에서 소송 준비에서 판결 선고에 이르기까지 지난 4년의 소송과정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사건의 발단이 된 최병승 조합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2010년 7월 22일에 나왔다. 대법원 판결 뒤 금속노조와 비정규직지회는 현대차를 상대로 불법파견 철폐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하고, 조직화의 수단으로 집단소송을 진행했다.
집단소송 진행을 위해 필자가 속한 민주노총 울산노동법률원, 민주노총 법률원, 금속노조 법률원, 참터, 새날 소속의 변호사로 구성된 법률단을 조직했다. 집단소송은 투쟁과 조직화의 목적아래 진행되는 것이므로 비정규직지회에 가입한 조합원만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노조를 탈퇴하는 경우 대리인을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비정규직지회는 노조 가입과 집단소송을 홍보하기 위한 공장별 간담회를 열고, 필자도 각 공장별 간담회에 참석해 대법원 판결의 의미와 집단소송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소송자를 모았다.
2010년 10월 말까지 모집을 끝냈는데 울산, 전주, 아산 공장 전체 인원이 1,900명에 가까웠다. 대규모 인원이 소송을 제기하다 보니 웃지 못 할 해프닝도 여러 번 있었다. 소송 안내문에 필자의 이름을 예시로 들어 소송비용 임금방법을 설명하였더니 자기 이름이 아닌 예시문대로 필자 이름으로 입금한 조합원이 여러 명 있어 은행에 확인 전화까지 해야 했다. 동명이인이 많을 것이므로 입금자 이름 앞에 반드시 소속업체명도 함께 써 달라고 했지만 이름만 적은 조합원이 여러 명이어서 조합원 명부와 대조해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 지난 2010년 겨울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법원 판결대로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현대차 울산 1공장을 점거했다.[참세상 자료사진/ 김용욱 기자] |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소송인단을 확정하고 2010년 11월 3일 소송을 제기했다. 최초에는 각 공장별로 소송을 제기해 20여 건에 가까운 사건이었으나 소송과정에서 진행편의를 위해 크게 41부 의제, 의무, 42부 의제, 의무 총 4개의 사건으로 병합됐다.
소송을 제기한 뒤 첫 난관은 변호사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원고와 법률단이 체결한 소송위임계약서 중 노조에서 제명되거나 탈퇴하면 사임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공정거래위원회와 변호사협회 윤리위원회에 제소를 했다. 배후세력(?)의 존재가 매우 의심됐지만 변호사협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공정거래위원회는 시정명령을 내려 일부 문구를 수정해야 했다.
본격 소송은 2011년 4월부터 진행됐다. 피고 현대차는 소송지연이 전략임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피고가 가진 하청업체 관리표준, 도급계약서, 정규직의 임금 등 내부자료와 원고들 근무시간, 임금자료 등을 제출해 줄 것을 변론과정에서 계속 요청했으나, 모르쇠로 일관해 3년 가까이 아무 것도 제출하지 않다가, 재판부가 선고할 의사를 내비치자 그 때서야 원고들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로 일부를 제출했다. 원고들이 언제 병가 내고, 무단결근은 언제, 얼마 동안 했는지 등의 자료를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피고가 자료를 내놓지 않으니 원고들의 협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반적 소송은 의뢰인과 면담에서 소송 쟁점을 설명하고 확인해야 할 사항을 의뢰인으로부터 직접 듣고 필요한 자료를 요청한다. 그런데 이번 소송은 인원이 많다보니 개별면담을 상세히 하기에는 시간적·물리적으로 불가능해, 작업변경이나 업체변경 내역에 대한 설문지를 배포했다.
설문지에 상세히 적어 별도로 묻지 않아도 자료정리가 되는 조합원들이 있는 반면에 이름이나 업체만 적고 거의 적지 않아 설문지를 의미 없게 만든 조합원들도 많아 일일이 전화로 조사를 다시 하고 엑셀 파일로 정리를 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들었다. 파견사건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현대자동차지부 대의원 등의 도움을 필요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현장검증과 전체 공정도를 작성하는데 필요했다.
현장검증은 41, 42부 재판부 판사 6명이 울산공장에 내려와 공장의 시스템과 작업모습을 직접 확인하는 것인데, 원고들은 10년 이상 일해도 자신에 담당했던 공정 외에 다른 공정이나 전체 시스템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체 시스템을 잘 아는 정규직 활동가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고, 필자를 비롯한 원고측 변호사들은 정규직·비정규직의 유대가 상대적으로 강한 1공장을 현장검증 장소로 재판부에 요청했다.
현대차는 2공장을 현장검증 장소로 재판부에 요청했다. 원고들 중 2공장이 가장 많아 현장검증 장소는 2공장으로 결정됐다. 2공장 대의원회와 간담회를 열어 취지를 설명하니 대의원들이 흔쾌히 협조를 수락해 대의원들 도움으로 현장검증은 잘 준비가 돼 원하던 바대로 결과가 나왔다.
이외에도 소송과정에서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이 있었고,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이 있었는데 지면관계상 모두 언급하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 필자는 사실 최초 소송을 제기할 당시에는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소송은 투쟁을 보조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고, 제 아무리 현대자동차라 하더라도 대법원 판결이 난 이상 이를 이행하지 않을 수 없고, 판결 선고 전에 교섭으로 타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과 달리 여러 이유로 결국 판결 선고까지 왔고, 최병승 판결은 개별 판결에 불과하다는 현대차의 주장이 틀렸음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하루 빨리 현대차가 자신들 잘못을 인정하고 법원 판결을 존중하길 촉구해 본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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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울산저널에도 게재됩니다. 참세상은 필자가 직접 쓴 글에 한해 동시게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