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배’가 복직하는 날 코오롱 다시 꺼내 입으시라

[코오롱 불매 연속기고(8)] 우리가 코오롱을 입을 수 없는 이유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은 내 고향이다. 성북동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고 몇 번의 사랑을 하고 그 수만큼 이별도 했다. 무엇보다 내 청소년기와 청년기의 절반이상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성북동 성당이 있다. 근래에 삼청동 카페들이 터널을 지나 성북동으로 넘어와 일주일에 한집씩 새로운 커피집과 식당이 생기고는 있지만, 조용하고 고즈넉한 성북동을 나는 정말 사랑한다. 물론 엄청난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곳은 성북 2동이고, 나는 평생 성북 1동에서 살았지만 말이다.

감옥에서 나와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난 코오롱 그룹 이웅렬 회장의 집이 성북동에 있다는 사실을 한 현수막을 보고 알게 되었다. 워낙 재벌들과 권세가들은 물론 주한 외교사절들과 외국 기업 CEO 들의 자택이 많은 동네이니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 현수막은 코오롱 해고 노동자들이 이웅렬 회장 집으로 가는 길목에 걸어둔 것이었다. 한동안 그 입구에서 시위를 하던 이들이 어느 날 새벽 우리 동네 그 회장의 집을 점거하고 회장 면담을 요구하다가 모두 연행되었다는 뉴스를 얼핏 본 것으로 코오롱과 이웅렬 회장은 그렇게 내게서 잊혀졌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정권이 바뀌고 경찰특공대가 용산에서 철거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평택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했으며 제주 강정에서 주민들을 쫓아내고 해군기지를 짓기 위해 바다에 시멘트를 부었다. 나는 용산 유족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강정마을 주민들과 함께 다시 거리로 나서 수백날을 보냈다. 그 거리에서 우리는 재능교육, 기륭전자, 콜트콜텍, 세종호텔,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등 투쟁 사업장의 많은 노동자들을 만났다. 오래 전 성북동 이웅렬 회장 집 앞에서 연행되었던 노동자들 중에도 있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과천 코오롱 본사 앞에서 천막을 치고 복직 투쟁 중이라는 코오롱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 최일배 위원장도 거리에서 만났다.

2005년 당시 재계 서열 23위였던 코오롱은 경영위기를 이유로 78명을 정리해고 했다. 그 대기업의 명운이 노동자 78명을 자르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이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해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섰고 농성투쟁과 소송을 비롯한 모든 방안을 동원해서 싸웠지만 세상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수십명이 함께 싸움을 시작했지만 10년간의 긴 세월은 그리 녹록한 시간이 아니었다. 하나둘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가족들을 건사하기 위해 투쟁의 현장에서 삶의 현장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12명의 해고노동자들이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를 이끌어가고 있고 이들 중 9명은 생계를 위해 일을 하며 투쟁을 하고 있고 3명은 농성장과 현장을 지키고 있다.

내 또래의 이에게 ‘코오롱 스포츠’는 국산 스포츠 의류의 상징이었다. 집집마다 코오롱 등산복이나 등산화가 하나씩 없는 집이 없었고, 소나무 두 그루가 자연스레 포개져있는 코오롱의 로고를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요즘이야 캠핑이 온 국민의 취미생활이 되고, 지인 결혼식에도 아웃도어 점퍼를 입고 가는 시절이 되어 수십 개의 국내외 브랜드들이 경쟁하고 있지만, 십수 년전 그 시절에는 캠핑용 텐트나 등산화, 등산복, 등산모자, 코펠냄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코오롱 일색이었다. ‘하늘채’라는 이름의 아파트도 짓고, ‘비코그린’ 같은 유명한 약도 만드는 회사라지만, 코오롱은 국민들이 사랑하는 대한민국 대표 스포츠 의류 기업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한 기업이 십 수 년 청춘을 바쳐 일 한 노동자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한순간에 거리로 내모는 일을 왜 했어야 했을까? 2004년 코오롱은 근로기준법을 근거로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로 인해 합법적으로 정리해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노조는 자진해서 임금을 20% 삭감하고 함께 회사의 위기를 넘어보자고 결의했고 회사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기로 노조와 합의했다.

그러나 코오롱은 이름만 그럴싸한 ‘희망퇴직’을 꺼내들며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단행하며 노동자들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를 만들어 낸 것이 노동자들인가? 아무도 희망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절망으로 빠뜨리는 ‘희망’퇴직이라는 것이 존재 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단순하고 상식적인 물음에 법원은 회사의 손을 들어주었고 코오롱은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았다. 결국 코오롱에서도 노동자들만 빼앗기고 내몰리게 된 것이다.

긴 싸움과 농성에 지칠 만도 하고 투쟁하는 현장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연대하고 힘을 보태왔던 코오롱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는 지난해 새로운 투쟁을 시작했다. 새롭다고는 하지만 사실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불매운동’이 그것이다. 불매운동은 그동안 수없이 많이 있었다. 조선일보 불매운동, 공업용 우지라면 불매운동, 이랜드 불매운동, 삼성불매 운동, 과대포장 과자불매 운동에 이르기까지 힘없는 노동자들이나 시민들이 거대 기업을 상대로 실력 행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사지 않는 것’이라는 싸움의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불매 운동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례를 한국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국민적 분노나 불신이 크게 차올라 불매운동을 시작했을 때, 일시적으로 주가가 떨어지며 회사가 문을 닫을 것처럼 엄살을 떠는 장면들을 본 기억은 있지만, 불매운동 때문에 망했다거나 노동자들, 시민들 앞에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했던 회사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형마트의 노조감시와 부당한 탄압에 경악하면서 대형마트를 거부했던 사람들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집에서 가깝고 주차도 편하며 한 공간에서 짧은 시간에 장을 볼 수 있는 대형마트 장보기를 슬쩍 시작하게 된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비판하고 산재 노동자들에게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는 파렴치함에 치를 떨면서도 전자제품은 역시 삼성이라며 상성전자의 냉장고나 TV를 사고 손안에는 삼성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코오롱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가 시작한 코오롱 제품 불매 운동은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 회사에 실제로 타격을 주고, 회사가 대화의 창구로 나오게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을 들여 강도 높은 불매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코오롱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 최일배 위원장이라고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매운동이라는 방식을 선택한 이들의 심정은 아마 마지막 싸움이라는 심정일지도 모른다.

매주 코오롱 불매 현수막을 등에 달고 전국의 산을 오르며 등산객들을 만나고 계란을 삶아 코오롱 불매 계란이라 이름 붙여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벌써 2년 동안 진행하고 있다. 많은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함께 산을 오르고 계란을 삶지만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중국 배우 탕웨이를 모델로 앞세운 ‘국민 등산복’ 코오롱을 상대하는 일은 녹록치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온 국민이 동참하는 코오롱 불매운동을 다시 한번 제안하고자 한다. 불매운동을 통해 코오롱을 망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마음대로 해고하는 기업은 시민들에게도 외면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자는 것이다. 그래서 코오롱이 노사가 상생하며 다시 국민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기업으로 거듭나게 하자는 것이다. 이는 ‘합법적’이라고 우기며 정리해고를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기업들에게도 경종이 될 것이다.

고립되어 외롭게 투쟁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은 책 ‘섬과 섬을 잇다’에서 최일배 위원장은 정리해고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의 자식과 또래 아이들이 전부 비정규직이 되거나 정리해고의 아픔을 겪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을 알기에 복직 투쟁을 멈출 수가 없다고 말한다.

쫓겨나고 내몰리는 이들의 싸움은 항상 그 당사자들만을 위한 싸움인 적이 없다. 이 싸움을 통해 어디선가 또 다시 자본과 공권력에 의해 쫓겨나고 내몰리는 수많은 ‘최일배’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자는 다짐이고 실천이어 왔다. 어차피 우리가 힘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을 모아 거대한 바위를 치고 또 치고 있는 것이다.

19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에서 어렵게 힘들게 영화를 만들고 전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독립영화인들을 만나고 있다. 오랫동안 내 인생의 영화로 간직하고 있는 ‘가족의 탄생’을 연출한 김태용 감독을 해운대 해변 포장마차에서라도 우연히 만난다면, 탕웨이 형수님께 부산평화도매시장에서 산 점퍼 하나를 결혼 선물로 드리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코오롱 점퍼를 잠시 벗어 장에 넣어두고 코오롱 정리해고 노동자 ‘최일배’가 복직하는 날 다시 꺼내 입으시라고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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