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로 해고되고 잡담했다고 해고되던 현장에서 ‘이렇게 인간답지 못하게 살 수는 없다’고 노조를 만들었던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무려 2,000일 가까이 공장 바깥에서 싸워야 했다. 90일이 넘는 단식, 고공농성 등 안 해 본 싸움 없는 이들이다. 그렇게 싸운 끝에 결국 이겨서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회장은 짐 싸들고 야반도주를 했고 노동자들은 다시 그렇게 버려졌다. 텅 빈 회사 사무실을 지키며 농성을 하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오체투지’였다. 이 역사만 나열해도 숨이 가쁘고 눈물이 나고 목이 멘다.
[출처: 김용욱 기자] |
그런데 그 ‘오체투지’ 행진은 그 싸움의 끝이 아니었다.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그 오랜 싸움을 거쳐 ‘이제 기륭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900만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해 낮은 몸을 더욱 낮추겠다’고 선언한 순간, 그 싸움은 결코 패배가 아니었다. 이제는 절망하고 더 일어날 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때,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기륭전자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더 많은 비정규직들에게 함께 사회를 바꾸자고 손을 내민 것이다.
이것은 낙관적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싸움에서 패배했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우리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우리가 밑거름이 될테니 같이 목소리를 내보자”고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질기게 싸워본 사람은 안다. 경쟁에서 밀려나고 쫓겨날까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하다가 그 삶을 떨치고 ‘인간됨’을 선언하며 ‘함께 사는 길’을 택했던 이들이 갖게 되는 즐거움과, 전망과, 의지를 말이다. 그래서 기륭전자의 싸움은 힘들고 고통스러웠고 결국 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새로운 용기를 내서 이제 우리 노동자들을 갉아먹고 있는 비정규직법 전면 폐기를 위해서 싸우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김용욱 기자] |
2015년 1월 7일, 그 오체투지의 바통을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이어받았다. 정리해고를 당하고 26명의 죽음의 길로 보내야 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청춘을 다 바친 회사에서 쫓겨나 200일 넘게 공장 굴뚝에 올라가 고용승계를 외치는 스타케미칼 해고노동자들, ‘미래에 올 경영상의 위기에 대비한 정리해고는 정당하다’는 판결에 소리죽여 울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그 하나하나의 투쟁이 절박하지 않은 것 하나 없고, 고통스럽지 않은 것 없지만 이 노동자들은, 노동자를 마치 일회용품처럼 쓰고 버리는 정리해고제도의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정리해고를 당하게 될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두번째 오체투지 행진에 나섰다. 그리고 그 길을 기륭전자와 학교비정규직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지킨다.
정부는 비정규직 대책을 내놓으면서, 기간제의 기간제한을 늘리고 파견허용대상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비정규직을 더 늘리겠다는 것이다. 정규직도 쉽게 해고될 수 있게 만들겠다고 했다.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신음과 아우성이 들리지만, 정작 나서는 이들은 많지 않다. 생계의 두려움, 언론의 비난, 공권력의 탄압이 공포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숨 쉬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노동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참고 견뎌봐야 더 쥐어짜일 뿐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쌍용자동차를 비롯한 정리해고 노동자들, 그리고 기륭전자와 학교비정규직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을 낮춰 물길을 낸다. 이 노동자들이 오체투지를 하며 지나간 곳에 지금 당장 메마른 현실을 적시는 물이 흐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리해고로 고통을 당하는 이들, 비정규직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숨죽이지 말고, 홀로 고통을 당하지 말고 같이 나서자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는 이상, 이 행진이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세 번이 네 번이 되고 회를 거듭하게 되면 그 때에는 지켜보던 노동자들의 눈빛도 달라지고,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마음도 모여서 흐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물길을 내는 것은 그런 이들의 마음을 모으는 길이다. 그래서 1월 7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되는 두 번째 오체투지 행진은 희망의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