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김수행 선생님을 먼발치에서 보거나 가벼운 인사 정도 드린 적밖에 없지만, 그 분은 나나 우리 모두에게 정말 많은 것을 베풀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고인이 일생을 바친 <자본론> 번역일 것이다. 고인은 이렇게 한탄한 적도 있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불만인 것은, 마르크스는 천지를 진동시킬 이론을 발견하는 데 일생을 보냈는데, 나는 왜 마르크스의 책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데 일생을 보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2001년 자본론 개역판 역자 서문)
하지만 그럼에도 고인은 자신의 이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고인은 “대다수의 주민을 못살게 구는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거나 타도하려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내부구조와 운동법칙을 완전히 이해해야만”하며, 그래서 “나의 연구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자본론>의 완역”이라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자본론>이 한국의 김수행이라는 역자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자본론>을 뭔가 이해하기 어렵고 특별한 사람들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오해한다. 일부 좌파 활동가와 학자들마저 그런 신비화를 부추기는 면이 있다.
군대 제대하고 도서관에서 그 책을 처음 빌려보기 전에 내가 갖고 있던 선입견도 비슷했다. 하지만 고인은 평범한 많은 사람에게 <자본론>이 더 많이, 더 쉽게 읽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역자는 최선을 다하였다. 펭귄판, 프로그레스판, 대월서점판, 북한판을 항상 참조하였고, 그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에는 디츠판을 찾아 보았다.”(1990년 <자본론> 역자 서문)
고인은 “번역에서는 단어나 문장의 독해력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의 완전한 이해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김수행 번역 <자본론>의 강점이다. 고인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 내용과 방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인은 대개 많은 지식인과 달리 “뭔가 ‘있어 보이는’ 멋진 표현이나 현학적 표현을 멀리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신정완 교수의 추도사 중)
“제가 번역한 방식은 단어를 중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말로 새롭게 쓰는 방식이었어요. 그러니까 생소한 용어가 나타나지 않아요.”
즉, 고인은 평범한 많은 사람이 마르크스 사상을 이해하고, 투쟁에 동참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출판사의 반대에도 한자를 한글로 바꾸고, 몇 차례나 더 고치고 고친 것도 이 때문이리라.
덕분에 우리는 마르크스주의가 딱딱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것이라는 걸 더 잘 알 수 있었다. 마르크스의 주장 속에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느끼는 똑같은 슬픔과 분노를 찾을 수 있었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고발하고 분노한다.
“만약 단테가 이 제조업의 광경을 보았더라면 그가 상상한 처참하기 짝이 없는 지옥의 광경도 여기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만약 용광로의 불을 끄지 않으면 연료가 낭비될 것이고(현재 낭비되고 있는 노동자의 생명은 어찌하고), 또 만약 용광로의 불을 끈다면 다시 불을 붙여 필요한 온도를 얻기까지 시간적 손실이 발생한다.(한편, 심지어 8세밖에 안 되는 아동들의 수면 시간의 손실은 샌더슨 형제에게는 노동시간의 이득으로 되고 있다.) 그리고 용광로 자체도 온도의 변화로 말미암아 상하게 될 것이다.”(그런데 동일한 용광로의 노동자들은 주간노동과 야간노동의 교대로 인해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주류경제학이 찬양해마지 않는 기업가들의 ‘절제와 절욕’은 이렇게 조롱거리가 된다.
“마치 조지아주의 노예 소유주가 ... 흑인노예들로부터 채찍으로 짜낸 잉여생산물의 전부를 샴페인으로 마셔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 일부를 보다 많은 흑인들과 토지로 재전환시킬 것인가하는 ... 곧 기묘한 성인이며, 근심에 잠긴 기사, 곧 ‘절제하는’ 자본가...”
고인은 우리가 이런 분노와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을 공유할 수 있도록 최상의 도움을 주었다. 고인은 자신의 필생의 작업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책을 번역해야지 하면서도 선뜻 착수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악법 ‘국가보안법’ 때문이었다. … 그러나 1987년 6월의 시민항쟁 이후 학문과 사상의 공간이 점차로 넓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경향의 연장선 위에 이 번역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모든 민주영령과 민주투사 및 양심세력에게 감사를 드린다.”(1989년 <자본론> 첫 역자 서문)
그래서 고인은 그후에도 언제나 국가보안법에 반대했고,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는 활동가들을 방어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변혁을 위한 많은 노력에 아낌없는 지지와 도움을 보탰다.
물론 고인은 번역과 마르크스 해설에 머물지 않고 현실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탐구에도 많은 기여를 남겼다. 특히 고인은 2차대전 이후 장기호황이 끝나며 심각한 불황이 닥친 1970년대 중반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다.
“주류경제학에는 공황이론이 없어요. 시장에 맡겨놓으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된다고 얘기하니까요. 반면에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공황이론이 가장 핵심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공부해봐야겠다고 생각해서 마르크스를 공부하게 된 거죠.”
그래서 고인은 1997년 IMF 위기, 2008년 세계경제 위기 등에 대해서도 단지 금융만이 아니라 과잉생산과 투자, 이윤율 저하 경향이라는 자본주의 근본적인 모순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많은 분석과 연구를 남겼다.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고인의 분석과 이론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앞으로 토론을 위한 길잡이로 남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인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인은 우리가 자본주의를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고, 평범한 노동자 민중 스스로의 도전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소련, 북한, 중국과는 달리 진정으로 자유롭고 해방된 사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를 타도합시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가장 쉽고 아름답게 타도할 수 있는가를 이번 대회를 통해 연구합시다.” (2007년 맑스코뮤날레 개막 연설에서)
“소련 책에는 새로운 사회가 어떻고, 어떻게 인간이 해방된다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어요. 무조건 계획경제를 하면 된다는 그런 생각 뿐이라구요.”
“노동운동을 하더라도 자꾸 임금인상에만 매몰되면 그 운동은 결국은 망한단 말입니다. 그래서는 새로운 사회가 오지 않는다는 말이죠.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이 세상을 움직이게 될 때 새로운 사회가 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꿈을 이어받아서 계속 씨앗을 뿌리고 개척해 나가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제가 사회과학아카데미를 하면서도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적지만 씨앗이 되어서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열심히 해야 한다. 올바른 것을 하면서 개척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죠.”
[안내] 고 김수행 선생 추모행사
일시 : 8월 7일(금) 오후 7시30분
장소 : 성공회대학교 새년천관 지하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