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만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게 아니다. “교수가 점잖지 못하게”란 말이 유체이탈 화법이다. “교수가 학생이나 가르치지 직선제 폐지에 반대하고 목숨을 버리다니, 신성한 대학에서” 유체이탈 화법을 이루는 말들이 한두 개 일리 없지만 이러한 유체이탈 화법 뒤에서 교수들은 대학의 투명인간으로 남아 있고자 하고 비정치적인 인간, 학원으로 변한 대학에서 학원선생으로 변신한다. 카프카 소설 속의 그레고리 잠자처럼 노골적으로 딱정벌레로 남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교수가 정치적인 일에 관여하는 것은 “교수가 점잖지 못하게”라는 유체이탈 화법의 된서리를 맞는다. 마치 나는 이 자리에 없다는 듯 존재의 알리바이를 추구하며 점잖게 학생들을 성폭행, 성추행하고 교실에서 가르치고 성적 매기는 일이 교수의 본연인 척한다. 스스로 대학의 허깨비이요 투명인간임을 자처하며 대학 본부 보직을 맡고 국가 및 재단과 공모하며 이권을 챙긴다. 그러나 현대시를 가르치며 부산대 교수회 활동도 하지 않았던 교수는 유체이탈 화법도 존재의 알리바이도 추구하지 않았다.
[출처: 부산대 총학생회 페이스북] |
배울 것이 없어 학생이 떠나는 대학, 정부의 집요한 억압에 항거한 교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부끄럽다. 가르칠 것이 없으면 떠나야 할 곳이건만 구차하게 나는 왜 여기 남아 있는가? 장바구니 강의 신청처럼 대학의 교과목을 인터넷 상품처럼 사고 넣고 빼는 대학, 교육을 쇼핑처럼 물건 소비하듯 소비하고 물건값으로 등록금을 내는 대학, 표절해도 무감하고 비리를 저지르고 성희롱을 해도 무감한 대학, 학생들 등록금을 재단으로 빼돌리고 땅을 사도 무감한 대학, 취업용 교과목으로 넘쳐나는 대학, 대학의 구조조정과 통폐합 앞에서 교수들이 유체이탈하는 대학, 대학을 사유물로 생각하는 세력이 있어도 “교수가 그러면 되나 학생이나 가르쳐야지”하는 유체이탈 언어 속으로 도피하는 대학, 제자가 헐값의 노동력 상품으로 팔려 나가도 강의 폐강이나 걱정하고 초과강사료 주판알이나 굴리는 대학, 비정규직 교수들에 대해 무감한 정규직 교수들로 넘쳐나는 대학, 대학 밖에서는 진보적일지 모르나 정작 대학 현장 안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교수들의 대학,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이 일어나도 별 감흥도 감정도 없이 사인으로 돌아가는 교수들, 아니 학원 강사들로 넘쳐나는 대학.
떠나긴 떠나야 한다. 하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식으로는 안 된다. 귀중한 생명을 버리는 것도 안타깝고 뼈아프다. 현재 나는 뭔가라는 통렬한 반성을 한다 해도 실천이 담보되지 않는 반성은 그 또한 유체이탈하자는 속셈일 뿐이다. 프랑스 대학에서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에 교수와 학생이 손에 손을 잡고 대학 건물을 감싸며 항의하던 모습을 나는, 우리는 언제까지 부러움과 경탄의 대상으로 바라만 보고 한국 사회 대학의 민주주의의 죽음을 넋 놓고 바라만 봐야 하는가?
총장 직선제가 다 무너진 한국 사회에서 마지막 남은 부산대가 정권이 보기에는 얼마나 가당찮았을까? 직선제로 총장이 된 사람이 직선제를 포기하니 부산대 고 교수는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지식인도 교수도 다 사라진 이 황폐한 대학, 대학이라고 할 수도 없는 취업양성소, 학원에서 교수들은 집단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떠나야 한다. 교사들도 가르칠 게 없는 학교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 이 운동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학의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투신자살한 부산대 교수의 죽음 앞에서 대통령의 유체이탈 화법은 비판하되 정작 자신들의 유체이탈 화법은 은폐하는 누를 범하고 말 것이다. 국가와 정부가 진정한 교육을 포기한 상황에서 정작 우리는 왜 대학을 포기하는 선언, 교육을 포기하는 운동과 실천은 하지 않은 채 진정한 실천을 에둘러 가기만 하는 운동을 하면서 진보를 자처하는 유체이탈 화법이나 구사하고 있지 않은지 깊은 반성이 요구된다. 학원 강사를 넘어 교수이고자 하고 교수를 넘어 지식인이고자 한다면, 대학 ‘안’에서, 교육 현장 ‘안’에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