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빈민운동 하던 김진홍 목사, 그 변절의 그림자

[낡은책] 새벽을 깨우리로다 (김진홍, 홍성사, 1982.1, 206쪽)

노무현 정권 때 김진홍 목사(뉴라이트 전국연합 대표)는 ‘좌파의 어둠’을 없애기 위해 뉴라이트를 시작한다고 선포했다. 김 목사는 젊은 시절에는 진보였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보수로 성숙됐다고 자평했다. 김 목사의 삶은 1990년 독실한 기독교인 임동진을 주인공으로 김자옥 등이 출연한 영화로도 나왔다.

1982년에 나와 딱 30년 된 이 책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김진홍 목사의 신앙간증집’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초기 김진홍 목사의 고민 속에는 그의 변절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의 변절을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우리는 과연 김 목사처럼 27번 철거당한 도시 빈민과 함께 싸우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갈팡질팡 젊은 시절

김진홍은 기독교 모태신앙을 뿌리로 자랐으나, 대학 땐 불교에 심취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당시 젊은이들이 흔히 겪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하나를 지니고 있었다. 오랫동안 김 목사를 따라 다닌 ‘지적 오만’은 이미 20대부터 나타났다. 고3땐 의대 또는 서울법대 합격을 목표로 맹렬히 공부했다. 대학은 늘 수석입학해 수석졸업했다고 자부한다. 이 사람 대구 계명대가 아니라 sky라도 나왔으면 큰일 낼 사람이었다.

아이스크림, 약장수, 화장품 외판원으로 번 돈을 사창가에 뿌린 게 세상 견문을 넓히는 기회였단다. 어깨 너머로 마르크스의 철학을 봤다지만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큰 문제를 생산했다”고 단박에 결론 내린다.

70년대 초 청계천 ‘뚝방촌’에 ‘활빈교회를 만들 초기에도 이화여대를 나온 아내와 아들이 병에 옮을까봐 늘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이렇다. “김 목사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괴물 같다.” 우리 안에도 늘 김 목사는 숨어 있다. 군사독재와 싸우면서 군사독재를 가장 많이 닮아간 70~80년대 운동권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울 수 없다. 그의 육필 기록을 들어 보자.

기독교 모태신앙을 연탄아궁이에

나는(김진홍)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 신앙이 대학 들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경 내용이 미신과 과장 같았다. 종교가 필요하다면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를 택할 게 아니라 한민족의 민족 종교를 형성함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대학 2학년 때 버르란트 럿셀의 책 <나는 왜 크리스찬이 아닌가>를 읽고 공감했다. 나는 성경을 연탄아궁이에 집어넣었다. 나는 무신론자 내지 불가지론자가 됐다. 내가 다니던 대구 계명대학의 대명동 캠퍼스 앞에는 화장터가 있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자살론>을 들고 다녔다. 대구 시내 보현사란 절을 찾아갔다. 기독교가 국민학교라면 불교는 대학인 셈이었다. <능엄경>이란 책을 밤새 읽었다. <금강경>은 훨씬 어렵고 깊었다.

나는 고3때 ‘의과대 필승 합격’의 쪽지를 달았다가 떼고 ‘축 서울법대 합격’이란 글을 써 붙였다. 그러나 막상 입학원서를 낼 땐 철학과로 지망했다.

대학을 수석 입학해 수석 졸업을 하니 모교에서 조교로 남았다. 나는 66년 5월 영문학과 1학년 철학개론을 강의중이었다. 석가는 설산에서 7년 사색한 뒤 도를 깨쳤다. 예수도 벽촌에서 목수로 업을 삼고 살다가 30이 지나서야 깨우쳤다. 그해 나는 모교의 특별 배려로 교비 미국 유학생으로 선발돼 출국을 준비중이었다.

미국 유학을 꿈꿨던 지식인

도미 계획했던 일체 중단했다. 여름방학에 서울로 올라와 만리동 고개에서 아이스케키 장사를 했다. 소의초등학교 교문 앞이었다. 지나는 행상인들을 불러 아이스케키 하나씩을 주고 쉬었다 가라고 권했다. 아이들이 급식 빵과 아이스케키를 바꿔 갔다. 빈병 수집 장사가 손수레를 끌고 하이데거의 책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서적을 읽었다. 나는 렛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시내 모 고등학교에서 독일어 교사로 있다가 따분해서 그만두고 손수레를 민다고 했다.

나는 서울역 부근 교회당에 찾아갔다. 설교의 요지는 교회당 건축 헌금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실망해 이름난 창녀촌인 서종삼으로 갔다. 피카디리극장 뒷골목이었다. 다 털어 2천 몇백 원을 줬다. 싱겁게 끝났다. 그 방에서 나는 성경을 끄집어냈다. 나는 임질에 걸렸다.

장난감 장사를 시작했다. 수입이 한결 높아졌다. 노동자 합숙소에서 자고 일어나니 전 재산이 든 가방이 없어졌다. 국부에선 계속 농이 흘렀다. 청송 산골서 자란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님의 기도를 들으며 자랐다. 빈털터리가 돼 나는 대구로 내려갔다. 용산역에 숨어 무임승차했다. 대전에서 강제 하차 당했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세계변혁의 철학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큰 문제를 생산했다. 67년 한해를 나는 약장수 화장품 외판원, 보험 세일즈맨 등을 겪으며 세상 견문을 넓혔다.

다시 기독교 품으로

67년 여름 나는 대학 철학과 홍응표 선배를 만났다. 홍 선배는 기독교 신안에 독실했다. 몇 년 만에 만난 홍 선배는 다방 탁자 위에 성경을 펴 놓고 나를 설득했다. 결국 홍 선배와 나는 성경연구를 시작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나는 방황과 고뇌 그리고 죄에서 해방된다. 나는 예수 안으로 들어갔고 예수는 내 안으로 들어왔다. 67년 12월 4일 밤 11시에서 5일 새벽 1시 사이였다.

한 알의 밀알이 썩으면

내가 예수 안에서 안심입명하자 가장 기뻐하신 분은 어머니였다. 나는 신학교에 가기 전 농촌교회에 가서 교역자 수련을 하기 위해 달성군 구지면 목단리 목단교회에 갔다. 월급 3천원에 쌀 한 말을 받는 전도사가 됐다. 이후 대구 청산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오라는 전갈이 왔다. 청산교회는 지식인들이 모이는 교회였다. 50이 넘은 내 어머니는 식모살이를 나갔다. 내는 장로회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신학교를 자퇴하고 대구로 내려와 노동자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철공소에 들어갔다. 철공소 사장은 교회 장로로 훌륭한 신앙인으로 교계에 알려졌다. 나는 일당 270원의 화부로 채용돼 1주일씩 밤 근무 낮 근무를 교대했다. 임금은 같은 계열의 다른 회사보다 10% 낮았고 작업시간은 1시간 더 길었다. 그 철공소 노동자에게 사장의 입으로 비춰지는 예수는 착취자였다. 나는 부당한 노동조건에서 예배를 강제하는 것에 문제제기 했다. 회사 소속 자가용이 대기했다. 그들은 내게 “선생님이 누구신 줄 미처 몰랐습니다”고 했다.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나의 주머니에 찔러 넣으려 했다. 나는 노조 결성을 구체적으로 진행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노동자 착취하는 사장

어느 날 일하다가 가마 조절기에 손을 대는 순간 “꽝” 소리와 함께 내 얼굴에 불길이 덮쳤다. 나는 쓰러졌다. 임금과 해고통지서가 우편으로 도착했다. 다친 나는 패잔병처럼 기가 죽었다.

나는 경산의 메노나이트 고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며 몇 달 쉰 뒤 71년 3월 신학교에 복교했다. 71년 5월 5일 세검정 삼각산 특별기도원에 갔다.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 휴게실에서 나는 노방 전도를 했다. 나는 용기를 내 연설했다.

연세대에서 도시빈민 선교훈련

여름방학에 연세대 부설 도시문제연구소 신상길 목사의 지도로 연희동 빈민지구에서 도시선교 훈련을 받았다. 연희동 산비탈 판자촌이 주무대였다. 그 때 판잣집 5동이 산사태로 몇 사람이 죽었다. 사망 중엔 초등학교 3학년 아이도 있었다. 아이 시체는 여름 땡볕에 방치됐다. 나는 산수노트를 펼쳐 그 광경을 적었다. 와 보지도 않는 교회와 찾아와 장례비용을 주는 창가학회가 있었다.

나는 서울 시내 빈민촌 실태를 파악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엔 18만5천동의 무허가 판잣집에 40만 7천세대 2백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았다. 서울시 인구 6백만 명의 1/3이었다.

나는 교회를 세울 후보지를 물색했다. 71년 8월 6일 나는 청계천을 답사했다. 청계천 6가를 지나 3.1 고가도로가 끝나는 지점부터 1만2천여 세대 6만여 주민이 사는 곳을 택했다. 행정지번으로는 성동구 송정동 74번지였다. 학형이를 데리고 시립아동병원으로 갔다. 완치됐다. 나는 활빈교회를 창립했다.

청계천 뚝방촌의 활빈교회

김학형으로 인해 청계천 송정동 74번지 속칭 ‘뚝방촌’을 드나들었다. 맨 먼저 송정도 74번지에 60세 이상 된 할아버지를 초청해 노인잔치를 열었다.

아내를 설득하는 게 큰 문제였다. 나는 결혼해 갓난아기가 있었다. 아내는 가정부가 셋이나 있는 부잣집에서 자라 이화여대 사회사업과를 졸업했다. 아들 동혁이가 빈민촌에서 건강을 해치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우리는 모은 30만원을 모두 투자해 방 3있는 판잣집을 14만5천원에 샀다. 집수리는 김종길 씨가 했다. 내가 고교 교사 때 3학년 학생이던 김영준 군이 찾아왔다. 나와 김종길, 김영준 군, 학형이 아머지 김인옥 씨가 교회 창립에 나섰다. 홍길동전을 따서 이름을 ‘활빈교회’로 지었다.

71년 10월 3일 창립예배를 앞두고 9월 29일 서울시가 철거반을 동원해 집을 헐어 버렸다. 한국 교회는 귀족화돼 빈민 근로자들이 교회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다.

DDT 작전

우리가 개발한 DDT 작전은 Door to Door Tackle에서 따왔다. 판자촌 주민들은 철거반원들을 철천지원수로 여겼다. 철거반원들이 타는 포장을 친 스리쿼터를 염라대왕차라 부르고 철거반원들을 염라대왕 졸개라 불렀다. 7채 중 맨 나중에 철거당한 집은 더욱 비참했다. 애기를 낳으려고 진통중인 임산부가 있었다.

나는 철거반장을 붙들고 따졌다. 하필 이런 추운 날에 철거를 강행하냐고. 그는 “높은 사람이 워커힐로 가는 데 오늘 당한 집들은 워커힐로 가는 도로에서 보이는 집들”이라고 알려줬다.

우리는 오늘 철거된 집들을 방문해 양식과 담요를 줬다. 최씨 집이 굶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원도에서 광산업을 하다가 실패하고 들어온 김씨 댁을 찾았다. 김씨는 모두 27번 철거당했단다. 그 집 딸이 일당 180원인데 더 나은 곳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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