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스러운 결과이지 않을 수 없다. 전교조가 해직당한 교사를 제외하는 방향으로 규약개정을 했을 때 노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도 걱정이지만 정부와 노동부의 압박에 대해 굴해 자주성을 포기한 모습의 전교조는 생각만 해도 아득했다. 그러나 전교조 조합원들은 역대 최고 투표율과 압도적인 거부의사로 정체성과 자주성을 선택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환영할 결과이다.
그러나 긴박한 상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0년 민주노동당 후원으로 교사들이 무더기로 징계받았을 때도, 2009년 시국선언이 조직될 때에도 전교조는 위기였다. 이명박 정부도, 박근혜 정부도 전교조를 주요 타겟 중 하나로 잡아왔기 때문이다. 해직교사를 조합원에서 배제하라는 고용노동부의 요구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정부는 계속해서 전교조의 숨통을 조여 왔다. 위기 속에 ‘전교조를 지켜주세요’라는 목소리는 더 간절해지고 더 절박해진다. 그런데 말이다. 헤밍웨이의 그 유명한 질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처럼, ‘전교조를 지켜주세요’라는 구호는 누구에게 외쳐지는 것일까?
전교조가 창립 초기 비합법노조로 가입교사들이 줄줄이 해임되고 연행될 때 교문에서 몸싸움하며 연대하고 지지했던 사람들은 학생들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전교조 세대’라 불리며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이 ‘전교조 세대’들은 자신들의 10대가 재현되는 듯한 지금의 전교조 국면을 보며 그때 함께 싸웠던, 존경하고 사랑하는 스승 그리고 전교조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하며 전교조 지지를 호소한다. 하지만 1980년대 창립 초기가 아니라 2013년 지금은 어떤가. 만약 전교조가 법외노조화되고 그에 투쟁하는 상황이 되면 학생들이 과거와 같이 전교조와 함께 싸울까.
나는 아닐 것 같다. 학생들이 탈정치적이고 입시경쟁에 시달리고 있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학생들은 전교조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전교조 교사들이 연대할 수 있고 지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동지’ 혹은 ‘같은 편’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교조 교사들이 학교와 학생들 간의 갈등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인 적은 별로 없다. 오히려 학교 편을 들거나 그렇진 않다 하더라도 중간에 끼여 침묵하거나 고작해야 학생들의 푸념을 들어주거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교사 역시 학교에서 운신의 폭이 좁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운신의 폭이 좁다 하더라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전교조는 져야 하고, 질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전교조는 학생들과 멀어져 있다.
전교조에 대한 탄압은 신자유주의와도 정부의 극우정책과도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와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원인이 어떻든 간에 전교조가 탄압을 극복하고 건강한 노조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학생들과의 공동전선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 중에서도 학생들과의 끈을 더 튼튼히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청소년들은 공개적으로 전교조 지지선언을 했다. 심지어 그들은 여러 언론이나 단체들에서 사용하는 ‘해임교사 탈퇴 시정요구’와 같은 말들이 아니라 ‘조합원 배제 명령’이라는 언어로 지금의 전교조를 지지했다. 지금의 쟁점에서 논의되는 해임교사 9명은 상대적으로 더 학생과 연대해서 운동한 교사들이다. 영화 <두사부일체>의 배경이 된 상문고등학교에서 사학비리에 맞서 싸운 교사라던가 일제고사 반대, 교사시국선언 조직 등을 이유로 해임된 교사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사들을 노동조합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전교조가 사학비리, 일제고사, 교사시국선언 등의 사회적 의제들로부터 발을 거두어들이는 것. 이는 곧 학생들과 연대하는 폭이 가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청소년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또한 ‘조합원 배제 명령’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청소년들은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를 알고 자신들이 누구의 편인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전교조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함과 함께 왜 전교조를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참교육을 수호합니다’라는 모호한 언어보다 더 명징하게, 학교라는 사회에서 누구와 함께 서 있는 지를 밝히는 것이 비전일 수 있을 것이다.
누구와 함께 서 있는지가 외부적인 비전이라면, 내부적인 비전도 필요하다. 거칠게 표현해서 전교조는 세대재생산이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은 조직이다.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교조를 중심에서 이끌고 있는 활동가들은 창립 초기 해직·해임을 경험했던 교사들이다. 다시 비합법노조가 될 위기에 서서 ‘젊은 교사들이 전교조에 가입하지 않는다’라는 한탄이 이어지기도 한다. 교직에 들어서는 과정이 얼마나 경쟁적으로 변화했는지, 요즘 세대들이 얼마나 탈정치화되었는지 등을 이유로 뽑는다.
그러나 젊은 교사들이 노동조합 가입을 꺼리는 이유에 대해 한탄보다 성찰이 필요하다. 전교조가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어떤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가? 한국사회에서 ‘교사’라는 직업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지나치게 가혹하고 전방위적인 역할기대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전교조 역시 조합원들에게 ‘참교육’, ‘자신보다 학생을 위하는 참교사’를 이야기한다. 이미 100kg 무게를 업고 있는 사람에게 100kg을 더 지라고 하는 셈이다. 참교육이든 노조운동이 되었든 모든 활동과 모든 운동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행복, 자신의 해방을 위한 것이어야 할 텐데 전교조는 교사들의 해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단협사항으로 업무경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고작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직사회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야기되는 연공서열, 나이로 인한 권위주의 역시 전교조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젊은 조합원들이 가장 배제당하고 가장 가볍게 취급당하기는 전교조나 교직사회나 매한가지.
지금 전교조가 겪고 있는 위기는 합법노조를 지켜내느냐 지켜내지 못하느냐는 말로 정리할 수 있는, 눈앞에 닥친 매우 선명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해결은 늘 좀 더 멀리 있는, 근본적인 것에서 찾아지곤 한다. 전교조가 학교민주화를 외치며 창립되었던 것처럼, 그 위기 역시 학교와 사회의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쟁취하는 것으로 극복될 있다. 그 ‘학교와 사회’ 속에 누가 포함되는지가 전교조를 지키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부디 전교조가 조합원 총투표가 선택한 결과에 힘입어 ‘전교조를 지켜주세요’라는 구호의 주어가 누구인지를 찾을 수 있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