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쉬고 밥 먹을 공간의 권리

[기획연재] 비정규직 사회헌장(11)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연구 공간을

[편집자주] 비정규직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이하 비없세)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가 무시되고, 기업의 이윤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는 세상에 문제제기하기 위해,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 스스로가 법적인 권리를 뛰어넘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는 길에 함께하기 위해,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사회헌장’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참세상과 함께 사회헌장의 내용을 하나씩 이야기하면서 그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합니다.

“10조. 공간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노동자는 업무에 필요한 공간이 있어야 하고, 쉴 공간도 있어야 하며 밥 먹을 공간도 있어야 한다. 그 공간에서 노조 활동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은 노동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권리입니다. 청소노동자들은 학교의 구성원인데도 따뜻한 밥 한끼 먹을 공간이 없어서 화장실이나 계단 밑에서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간병인들은 옷 갈아 입을 공간이 없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습니다. 알바하는 이들에게도 공간을 주지 않아서 가방 놓을 곳을 찾아다닙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비정규교수들도 대학의 일원인데 학생들과 상담하고 연구할 공간이 없어 떠돌게 됩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공간의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은 그 노동자들이 소속감과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위축되도록 만듭니다.

일상적으로도 공간의 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은 노동조합 활동에서도 권리를 갖기 어렵습니다. 인천의 GM대우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음 노조를 만들었을 때 회사 식당과 회사 안 사거리에서 선전전을 했다는 이유로 정규직 관리자들에게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 공간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업무에 필요한 공간, 밥 먹을 공간, 쉴 공간, 연구할 공간, 노조활동을 할 공간 모두가 노동자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권리입니다.

한국의 대학에는 교원으로는 정규직 전임교수와 비정규직 강사, 직원으로는 정규직 직원과 계약직 직원이 있다. 그리고 시설관리, 식당, 주차, 운전, 청소, 경비 등 각종 교내 일을 맡아 하는 노동자가 있다. 이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처우가 가장 열악하다는 용역노동자들과 높은 등록금을 내면서도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이다. 이처럼 한국의 대학은 소수 정규직 노동자들과 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사회 어느 부문보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높다. 대학이 교육기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어느 곳보다 비인간적인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고 타의 모범을 보이는 현장이어야 마땅하나 현재 그것은 멀기만 한 우리의 미래일 뿐이다.

그중 오랫동안 크나큰 사회문제로 제기되어온 대학 시간강사 문제는 우리 대학 사회의 모순을 뚜렷이 비춘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비정규직 노동자인 대학 시간강사의 어려움을 우리는 보통 경제적 어려움과 신분상의 불안정으로 정리한다. 일명 ‘보따리장수’라 할 정도로 시간강사가 겪는 어려움은 공간 문제에서 응축되어 나타나고, 공간 문제는 전임교수들과 강사들 사이에 극명한 차이를 드러내준다.

대학 강사는 학문을 연구하고, 그 연구에 기초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을 주업으로 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작업을 어디서 하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장소는 대체로 강의실이고, 여기서는 전임교수와 강사 사이에 차이가 없다. 그런데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 한쪽은 완벽하게 자기만의 공간이 있고, 다른 쪽은 아무런 자기 공간도 없이 교수나 학생들을 위해 설정된 공간에 빌붙어 있을 뿐이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전임교수들은 넓고 쾌적한 자기 집 서재나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다가 시간에 맞춰 강의를 하러 가면 된다. 강의실에서 다 끝나지 않은 학생들 질문과 상담은 연구실에서 처리하면 된다. 시험지와 리포트도 강의실에서 가까운 연구실에서 채점하고 평가하면 된다. 이렇게 자신의 연구실에서 연구와 교육의 임무를 수행하니 전임교수들은 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강사들 처지는 그와 정반대다. 강사들은 자기 집이나 학생들 틈에 끼어 도서관에서, 아니면 교수휴게실이나 강의준비실에서 연구하고 강의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부모에게 특별히 물려받은 재산이 없을 경우,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 강사들의 집은 작고 전·월세로 옮겨 다녀야 하는 불안정한 공간이다. 이에 많은 강사들이 연구하고 강의를 준비할 공간을 확보하는데 큰 애로를 겪는다. 그러면 도서관은 어떠한가? 보통 학생들에 맞추어 설계하고 운영하는 도서관에서는 많은 서적을 깔아놓고 컴퓨터를 켜놓고 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논문 작업을 할 수가 없다. 또 교수휴게실 등은 강의에 들어가기 전 차를 마시며 잠시 쉬는 용도로 만든 곳이다. 그러니 이러한 곳에서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는 한― 연구하고 강의를 준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강사의 수에 비해 그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교수님’이라도 행차하시면 구석에 찌그러져 있거나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강사는 시험지와 리포트를 짊어지고 다니며 검토하고 채점해야 한다. 수강생의 수가 100명이라도 넘으면 그야말로 박스 가득한 양이 된다. 이삿짐 나르듯 집으로 가져와서 뭣 하러 리포트를 제출하라고 했을까 후회하며 읽고, 아니면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지 2~3장에 가득 답을 적은 ‘성실한’ 학생들을 ‘원망’하며 채점을 한다. 강사와 학생들의 관계는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고도 풀리지 않은 문제를 묻기도 하고 선생이자 선배인 강사들에게 진로상담 등을 할 때도 있다. 강사들이 이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게 학생과 얘기를 나눌 장소이다.

대학은 연구를 하고 그에 기초해 교육을 진행하는 곳이다. 그러나 대학 교육과 연구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강사들은 연구할 공간이 없어서 이리저리 공부할 공간을 찾아 헤매야 한다. 각 대학에 강사들에게 연구하고 교육을 준비할 장소만 마련한다면, 한국에서 연구하는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지금 보다 나은 연구를 할 테고, 질 좋은 대학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대학은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고, 또 인간의 얼굴을 한 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있으면 내가 전월세로 사는 집 계약 기간이 곧 끝난다. 집주인이 보증금이나 월세를 올려달라고 하면 대학 때부터 모아온 그 많은 책들을 갖고 또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하나? 이번에는 정말 두 눈 딱 감고 절반 정도는 버리는 것이 나와 아내와 아이의 행복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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