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반정부 투쟁인가?

[기고] ‘민주주의 수호’로는 박근혜 정권과 싸울 수 없다

박근혜 정권 9개월 만에 정권퇴진의 구호가 터져 나왔다. 사회적 사실이나 현상이 충분히 무르익지 않으면 정치적 발언을 삼가는 종교계에서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정권 창출의 가장 큰 원동력은 경제민주화와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였다. 이를 정치쟁점으로 만들어, 이명박 정권의 정치와 차별화시켰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보수 세력의 결집과 무능한 민주당을 등에 업고, 이명박 정권의 정치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당선됐다.

그러나 대선 자체가 거짓이었음을, 당선 일등공신이었던 공약도 거짓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박근혜 정권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부정선거의 확실한 증거가 계속 드러나고 있다. 국정원 대선개입을 덮기 위한 공작정치의 전형인 NLL대화록도 공개했다. 이어 국정원 수사를 지시한 검찰총장도 잘라냈다.

하지만 진실은 스스로 드러내며 기획하는 법. 국정원 선거관련 댓글이 120만개가 넘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진실과 이 진실을 지우려는 비열한 작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고 있다. 이른바 ‘국정원의 정치’가 한국사회를 가로 지르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빈껍데기 공약이 줄을 잇고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후보 시절 박근혜 정권을 가장 많이 지지한 노년층에 대한 복지공약인 기초연금 확대지급마저 수정했다. 4대 중증질환 치료비 100% 보장, 경제민주화, 106개의 지역 사업 공약, 철도 민영화 추진반대 등 약속은 지킨다는 박근혜 정권, 자기 입으로 떠들어댔던 공약들마저 파기하고 있다.

결국, 박근혜 정권은 시혜적 복지공약과 경제민주화 정책기조를 포기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책 즉, 공공부문 민영화(사유화) 정책, 경제민주화 정책파기를 넘어 노골적인 친기업 정책으로 이어지졌고, 통합진보당의 탄압, 전교조, 공무원노조 등 저항하는 사회운동진영을 종북 낙인과 탄압으로 드러냈다.

[출처: 자료사진]

문제는 ‘어떤’ 反정부투쟁인가?

이제 박근혜 정권과 이명박 정권의 차별성은 사라졌다. 이 정권의 반동적 성격이 보다 더 솔직하다. 대중의 환상과 기대감이 사라진 곳에는 오만한 모습으로 재벌과 공생하는 반동적이고 反민중적인 박근혜 정권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 종교계를 필두로 反정부투쟁이 투쟁의 대세를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노동자민중과 사회운동세력의 투쟁은 녹록지 않다. 분노는 기획되지 못하고 개별화되고 있으며, 국민의 분노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군사독재시기에는 국민이 민주화운동에 큰 지지를 보냈지만,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확보된 지금 민주주의는 일반 국민에게 중요 의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민주주의 절차가 훼손된 것을 사실이나, 시국대회가 중심에 놓고 있는 ‘민주주의 수호’는 국민에게 낯선 그 무엇이다.

근대 이후 사회의 기능적 분화와 관련하여 대의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의 중요성이 증대되어 왔다는 주장을 대폭 수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선거와 대중의‘자기지배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 동일화를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선거는 민주주의 수단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선거를 민주주의 그 자체로 보는 발상은 그 인식,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진보와 무관한 보수정치의 원조, 슘페터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反박근혜 즉, 反정부투쟁은 계급적 주체와 정치적 관점과 목적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민주당처럼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더럽혔기 때문에 국정원과 박근혜 정권을 규탄한다면 그것은 선거주의와 합법주의 정치 관점이다. 박근혜 정권의 공안탄압, 민주주의 파괴는 직접적으로는 자신을 당선시킨 부정선거 사실을 은폐하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극우반동의 장기집권을 위한 전략이다. 동시에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국가권력의 대응이다.

민주주의 훼손과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대중이 직면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존’이다. 생존의 벼랑에서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욕망은 단순하다. 그것은 권력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생활이 개선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그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강력한, 실제로 그 꿈을 실행시킬 수 있는 타자에 대한 욕망을 자신의 욕망과 동일화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것이 지난 ‘자수성가한’ 사장 이명박 정권 태동의 배후였다면, ‘70년대 고도성장’ 시기 박정희 군사정권 향수가 박근혜 정권의 배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자본주의는 결코 민주주의와 어울릴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항상 복수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 가운데 그들이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그것과 조응할 뿐이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생산현장에서는 물론, 다양한 영역에서 재생산되는 비대칭적인 사회관계를 매개로 타자를 수탈, 착취, 억압, 배제함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신자유주의 특징 즉, 권력과 부를 독점한 1%와 그렇지 못한 99%의 긴장과 대립은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출처: 자료사진]

생존권적 요구와 정권퇴진 요구를 결합시키자

대중이 원하는 것은 주어진 현실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대중은 ‘종북’이라는 사회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박근혜 정권에 지쳐가고 있다. 오로지 종북 알리바이를 통해서 정권을 확인할 뿐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권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노동자민중에 대한 일상적인 공포정치와 저항하는 세력에 대한 탄압뿐이다.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고 힘에만 의지하는 권위주의는 정치적 지도력도 없고,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킨다.

하지만 노동자민중은 정부와 자본에 맞서 투쟁의 불길을 서서히 지피고 있다. 전교조는 정부의 규약시정 명령을 단호히 거부했다. 철도민영화에 맞선 철도노동자의 투쟁과 대다수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가 있다. 우리만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과 자본에게 분노한 노동자민중이 투쟁의 전선으로 뛰쳐나오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공장’의 파업을 한국사회를 구성하는 정권의 문제로 확장 해보자. 과거 전노협 투쟁을 상기해보자. 일상적인 임금인상 투쟁이 정권의 성격을 드러냈고, 반정부적 요구가 투쟁의 과제가 되었다. 2013년 쌍용차 노동자의 투쟁이, 밀양이 그리고 전교조, 철도민영화 저지투쟁이 그러하다. 신자유주의 공포정치의 투쟁은 일상적인 영역의 투쟁을 반정권 투쟁으로 밀어 올린다. 다만 싸움의 승패는 우리가 더 대담하게 공세의 고삐를 쥘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대중에게 새로운 투쟁의 기운이 필요하다. 사회운동진영의 투쟁을 확장시키면서 건강한 확신을 불어넣어 주어야 한다.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삶을 변화시키고 국가권력이 책임져야 할 생존의 문제는 반드시 집요하게 책임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자민중의 삶에 근거한 투쟁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국가권력의 속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민주주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문제임을 ‘스스로’ 확인하자. 그래야만 생존권적 투쟁은 정치화되고 권력의 심장을 마침내 겨누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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