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넘삼벽
2012년 어느 날 삼성에버랜드 노동자 조장희, 박원우, 백승진, 김영태를 만났다. 삼성노조의 간부들이었다. 그들은 2011년 7월,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면서 노조를 만들었다. 삼성그룹이 이들을 냉대하고 범죄자로 몬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이들을 만나 느낀 것은 삼성그룹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부끄러움이다. 금속노조가 부끄럽고 민주노총이 부끄러웠다. 이들이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에 가입하려고 했지만 받아들인 조직은 없었다.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하려는데 민주노조 중에 그들을 받아들인 곳이 단 하나도 없었다.
부끄러움과 함께 강력한 벽을 느꼈다. 헌법과 법률이 아무리 보장한다고 해도 노동권이 결코 넘지 못한 바로 ‘넘을 수 없는 삼성의 벽’이다. ‘넘삼벽’을 향해 돌진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김용철, 이상호, 노회찬, 그리고 희귀성암에 걸려 죽어간 노동자들과 그 유족들....그리고 에버랜드 노동자들은 줄소송으로 시달리고 무노조교육을 통해 주변동료로부터 차단당하고 심지어 범죄자로 취급되는 고립감속에서 살고 있었다.
두 개의 무기
“삼성의 힘이 뭐라고 생각해요?” 삼성그룹 관계자를 만났을 때 물었다. “조직력입니다” 그의 답이었다. 삼성은 막강한 조직력으로 노조 만들려는 노동자 몇쯤은 가볍게 누른다. 삼성에 맞서려면 친구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민주노조는 삼성왕국에서 숨죽여 살아온 노동자들에게 친구가 되지 못했다. 2012년 말, 뒤늦게 금속노조 경기지부 간부들은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하려는데 받아들이는 것은 의무다”라며 삼성노조를 금속노조 경기지부 삼성지회로 받아들였다. 민주노조 밖을 떠돌던 삼성노조가 비로소 민주노조 안에 들어왔다.
노조만으로는 부족하다. 또 하나의 친구가 필요하다. 바로 삼성노동자들을 지키기 위한 튼튼한 우산이자 방패인 사회연대 네트워크다. 삼성왕국의 영향력이 곳곳에 뻗어 있기에 삼성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지키려면 사회각계각층의 도움이 절실하다. 민주노조가 에버랜드노조를 외면하고 있을 때 이들의 벗은 다산인권센터 등 몇몇 활동가들이었다. 민주노조가 친구가 되지 못할 때 바로 그 곁을 지켜준 사람들이다. 일 년 전 다산인권센터, 반올림, 금속노조 경기지부, 삼성지회가 모여 저 삼성왕국의 무게에 눌려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짐을 함께 짊어질 친구인 ‘삼성노동인권지킴이(SLW-Samsung Labor Watch)’를 만들기로 했다. 벌써 일 년의 준비를 통해 12월 10일 7시 가톨릭회관에서 공식출범한다. 이제 비로소 우리는 삼성의 벽을 넘을 두 개의 무기를 갖추기 시작했다.
75년만의 사건과 지킴이들
지난 6월 부산동래의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서 사건이 터졌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위영일과 신장섭의 소박한 요구는 짓밟혔고 이 두 사람은 해고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권영국 변호사와 은수미, 장하나 의원, 금속노조 간부 등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세상에 알렸다. 삼성지회 노동자들은 동래센터의 삼성전자서비스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들이 삼성지회가 그토록 외롭게 맴돌다 열어 놓은 문을 통해 금속노조의 조합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했다.
7월 14일, 삼성전자서비스지회가 결성총회를 가졌다. 한 언론사는 “75년 만에 무노조 삼성을 서비스 기사들이 깼다”고 보도했다. 아직 조합원이 소수인 삼성지회도 있지만 다수가 대중적으로 살아있는 민주노조를 만들었으니 맞는 얘기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지만 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업무지시와 보고를 한다.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센터 동료들과 발빠른 소통을 할 줄 안다. 밴드를 만들어 전국에서 소식을 공유했다. 누군가 “밴드노조”라고 했다.
아무리 온라인을 잘 활용해도 일이 벌어지고 해결되는 것은 오프라인이다. 삼성노동인권지킴이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발 빠르게 각 서비스센터 앞 일인 시위를 시작했다. 온라인에서 떠돌던 얘기들은 출근하는 서비스노동자의 현실로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일인시위를 부탁했다. 금속노조는 전국적 조직망을 통해 일인시위에 들어갔다. 8월 휴가에 들어가기 전에 1,000명의 조합원을 만들자던 목표를 초과달성했다.
부산 동래에서 발생한 문제는 그냥 묻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국회와 민변 등을 통해 언론에 알려지고, 즉각적으로 법률소송에 돌입하면서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당, 법조계, 언론 등과 발 빠르게 연계할 수 있는 네트워크 때문이었다. 금속노조가 노조출범과 조합원확대를 위해 뛸 때에 삼성노동인권지킴이를 비롯한 사회운동단체들이 함께 뛰었다. 노조와 사회운동단체라는 두 개의 무기가 왜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과정이었다.
그네바로? 건희바로?
야당과 진보세력들은 민주주의와 ‘반박근혜’ 또는 ‘박근혜 정권 퇴진’을 외친다.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4.19혁명과 함께 민주화물결이 몰아칠 때에 빈곤은 심각했다. 바로 이 빈곤을 배경으로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면서 성장프레임이 확산되었다. 시민주권의 시대는 빈곤을 배경으로 국가의 시대, 군사독재국가의 시대로 뒤바뀌었다.
80년대 민주화물결이 솟아오르고 국가의 시대가 시민주권의 시대로 바뀌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97년 경제위기와 함께 민주화시대는 기업권력의 시대로 바뀌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시민의 권리를 기업권력에게 옮긴 것이다. 비정규직과 양극화의 확산에 따른 불만이 쌓이고 촛불시위를 통해 시민의 열정적인 참여가 나타났다.
촛불이 꺼지자 “촛불의 진화”를 외치면서 선거와 정당정치에 대한 열망이 솟아올랐다. 2011년 지방자치선거와 2012년 대통령선거를 통해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가 떠올랐다. 기업권력을 국가권력을 통해 누르고 국가를 통해 복지를 실현하자는 국가의 시대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권이 탄생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앞세운 기업권력의 시대는 ‘종북몰이’를 앞세운 국가의 시대로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업권력이 약했던 박정희 정권과 강력한 기업권력이 존재하는 박근혜 정권은 다르다. 삼성왕국이 정권까지 주물럭대는 모습을 보면서 “대통령은 삼성의 바지사장이다.”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 사회의 제1권력은 자본권력이다.
수많은 민중들의 삶이 팍팍한 상황에서 민주주의 프레임보다 민생 프레임이 훨씬 강력하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군사독재가 탄생했던 과거를 주목해야 한다. 신빈곤의 시대에 외쳐야 할 민주주의는 국회나 청와대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기업의 문 밖에 멈춰선 민주주의다. 경쟁과 유연화 등 기업이데올로기가 민중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기업으로 이동했던 권력을 국가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주권으로 옮겨야 할 시대다. 주권 없이 살아가는 노동시민의 권리를 찾는 것은 민생과 민주주의 프레임을 통합하는 시대적 과제다.
삼성의 약점은 강하다는 데 있다
몇 가지를 묻자. 한국에서 비정규직이 늘어나면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은? 사보험이 늘어나면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은? 창조경제보다 먼저 창조경영을 외친사람은? 가장 많은 장학생을 거느린 사람은? 헌법보다 더 강력한 법은? X파일의 창조자는? 용산참사의 몸통은? 역사왜곡의 돈줄은? 알바천국 진짜사장은? 녹색을 제일 미워하는 기업은? 자사고를 앞세워 공교육 무너뜨리는 기업은? 기업살인 제일 많이 은폐한 사람은? 공기업민영화에 가장 강력하게 앞장선 사람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이건희 또는 삼성이다. 삼성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은 없기에 삼성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 삶은 바뀔 수 없다. 이 때문에 삼성을 바꾸자는 삼바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여야 한다. 삼성을 바꾸는 일은 결코 노조만의 단체교섭과 쟁의행위로만 이뤄질 일이 아니다. 강력한 사회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삼성의 약점은 사회전체에 영향이 미칠 정도로 강하다는 점이다.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숱한 영역에서 쟁점을 만들었다. 구럼비 폭파, 불산유출, 용산참사, 삼성자사고, 민영화 등 노동문제를 넘어 환경과 기업살인의 문제에 삼성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까지 이 영역들은 모두 정치화의 프레임에 따라 정권과의 투쟁으로 연결시키려는 노력만 있었다. 삼성이라는 기업권력이 이 모든 곳에 스며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았다. 국가권력에 맞선 투쟁은 정당정치라는 제한된 영역으로 흡수된다. 기업권력에 맞선 투쟁은 노동자와 소비자들이 함께 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가장 많이 활동하는 기업권력의 현장에서 주권자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삼성이 직접 영향을 미치는 최소한 130만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주권자로 재탄생하는 과정이다.
미션파시블, 화이트 컨슈머가 되자
이제 ‘넘삼벽’은 없다. 삼성지회와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그 벽을 넘고 있다. 최종범씨의 죽음에 함께하는 열사대책위원회에 참여한 시민사회단체들이 벽을 넘고 있다. 과거의 삼성에 맞선 개인들의 폭로나 저항은 제압되었다. 소액주주운동을 비롯한 일부시민단체들의 노력은 기업외부에서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삼성왕국의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합세한 시민사회운동이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삼성에 맞선 사회운동은 일시적인 연대를 넘어서야 성공한다. 그래서 ‘삼성노동인권지킴이’가 중요하다.
12월 3일부터 최종범 열사의 유족들이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노숙농성을 하고 있다. 더 이상 삼성에서 벌어지는 기업살인을 방치해선 안 된다. 삼성전자서비스노동자들의 성공여부는 삼성을 바꿀 수 있는가를 가름한다. 전통적인 제조업 노동자들의 힘이 생산을 중단시키는데 있었다면, 삼성전자서비스노동자들의 힘은 삼성전자의 서비스 시스템을 뒤흔들 수 있는가에 있다. 삼성전자가 막강하게 성장한 중요한 이유인 CS(Customer Satisfaction 고객만족)시스템을 흔들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우리 모두는 삼성의 고객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전국의 삼성전자서비스센터에 갈 수 있고 고객으로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전국에서 강력한 고객삼바운동을 일으키자. 우리 모두 삼성노동자들의 인권을 지키는 ‘화이트컨슈머’가 되자. 우리 모두 삼성노동인권지킴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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