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1년, 2013년 한국사회의 인권현실

[기획연재] 인권의 날들을 기억하라(1)

[편집자주] 프로젝트 <그날들>은 60여 개 단체들이 참여하여 2013년 기억해야 할 인권의 날들을 모은 프로젝트입니다. 모두 89개의 날들이 모여 소책자와 인터넷 타임라인(hrnet.jinbo.net/thedays2013)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민중언론 <참세상>과 함께 기획하는 연재 [인권의 날들을 기억하라]는 위와 같이 모인 인권의 날들에서 출발합니다. 흩어진 날들에 대한 기억을 넘어 2013년 인권 현실을 되돌아보며 주목해야 할 흐름을 5회에 걸쳐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대선에서 개별 후보자에 대한 좋고 나쁨을 떠나 누가 되더라도 더 두터운 인권과 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희망했다. 그런데 지난 정권의 1년은 그렇지 못했다는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본다. 더 두텁고 강해지기는커녕 엄청난 퇴보를 경험했다. 최근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죽음으로 추모 열기가 강하다. 나는 고인이 대통령으로 선출되던 선거에 동료 인권활동가가 공정선거감시단으로 갔던 일을 기억한다. 흑백화해와 새로운 시대가 열림을 환영하는 의미로 세계적으로 선거감시단을 만들었는데 ‘감시’보다는 역사적 선거에 대한 ‘응원’의 의미가 깊었다. 한국은 특히 군부독재에서 문민정부로의 민주적 이행의 사례로서 국제인권사회로부터 감시단 참여를 환영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국가권력기관들의 부정한 선거개입을 목격하고 있고 흡사 체육관 대통령 선거 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그렇게 정당성이 허약한 집권권력은 국민을 향해 ‘겁박’을 일삼고 있다. 조금이라도 심기를 거슬리는 말을 하면 입을 막고, 걷어차고, 쫓아내고 가두려한다. 이런 토대에서 어떻게 두터운 인권과 강한 민주주의를 계획할 수 있을까? 그래서 현 정권은 지난 1년간 한 일 없이 소위 4대악과의 전쟁을 벌였다.

세계인권선언의 배경은 2차 대전의 참상과 그런 비극을 낳은 구조적 악에 대한 반성이었다. 일례로 영국의 정치인 비버리지는 삶의 불안이 파시즘의 온상이 됐다는 점에서 복지국가를 구상하며 5대 거악을 언급했다. 그것이 비버리지 보고서였다. 5대 거악이란 ‘결핍, 질병, 불결한 환경, 할 일 없음, 무지’였다. 오늘날 ‘빈곤, 건강, 생태, 노동, 교육에 대한 인권’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버리지는 소위 좌파가 아닌 우파 정치인이었다.

반면 현 정권의 4대악이란 ‘불량식품,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이다. 여기에 보너스로 주취폭력이 추가된다. 여기서 극명한 대조는 구조적 악에 대한 싸움이냐 개인의 일탈과의 싸움이냐이다. 개인의 일탈과 책임으로 몰아갈 뿐이니 5대악과 맞서는 ‘두터운’ 인권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또 2차 대전에서의 학살을 생각해보자. 인류사에 끔찍한 학살이 많았지만 그 참혹함으로 인해 ‘홀로코스트’란 고유명사를 얻게 된 것이 2차 대전의 유대인 학살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고유명사가 된 고통들의 이름을 떠올린다. 존엄한 노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고유명사로 우리는 ‘쌍차 노동자’의 이름을 부른다. 평화로운 생존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고유명사로 ‘강정’을 부른다. 집에 대한 권리는커녕 방 한 칸, 점포 한 칸에도 다가갈 수 없는 장소 없는 이들의 고유명사로 ‘용산’을 부른다. 앞 세대의 삶에 대한 존중과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 상실의 고유명사로 ‘밀양’을 부른다. 얄팍한 민주화에서는 셈해지지 못했던 이들의 고유명사로 ‘형제복지원’을 부른다. 소위 정상시민들의 얇은 시민권과 형식적 민주주의에서는 배제됐던 장애인과 성소수자와 청소년의 이름을 부른다.

마지막으로 세계인권선언의 중요 배경이었던 나치의 폭정을 떠올린다. 나치가 즐겨 사용한 방식은 ‘희생양 만들기’였다.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을 희생양을 제물삼아 처리하려했다. 그 대표적 희생양이 독일에선 유대인이었다. 지난 1년 집권 권력은 ‘종북몰이’와 ‘혐오’로 희생양 만들기에 집중해왔다. 집권 권력에 비판적인 생각과 실천들은 종북으로 누르려 했고, 빈곤대책대신 빈곤한 사람에 대한 혐오를, 인권존중 대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부채질해왔다.

이에 집권권력에게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을 알려주고 싶다. 그것은 “사람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최후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인권보호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최후수단을 강요받고 있다. 저항권은 세계인권선언에 적힌 모든 권리들의 전제조건으로서 전문에 명시돼 있다. 새겨들어라. “사람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최후수단으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연재순서>

- 박근혜 정부 1년, 한국사회의 인권현실 :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 ‘종북’, 공안기구가 만들어낸 억압과 자유 : 바리 (진보네트워크센터)
- 차별과 혐오에 맞서 평등을 예감하라 :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 대자본의 권력 아래 짓밟히는 노동의 권리 : 오진호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 연대, 오래된 말 속에 담긴 새로운 기운 :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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