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언의 시신이 순식간에 백골이 되어 발견된 것은 분명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7.30 재보선에서 새민련과 안철수의 ‘새정치’가 백골화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별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선일보> 등의 찬양 속에 새민련의 ‘우클릭’을 이끌어 온 김한길은 이제 와서 자신을 비웃는 우파를 보며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안철수는 아주 짧은 시간 만에 ‘새정치’를 혐오와 냉소의 대상으로 바꾸는 탁월한 능력을 선보여 왔다.
새민련 일각에서 ‘세월호를 잊고 이제 경제 살리기로 나가자는 사람들’을 탓하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웃기지도 않는다. 물론 박근혜와 새누리는 세월호를 진작 머릿속에서 지웠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억까지 지우려 안달해 왔다.
‘기억 제거 패치’는 북한이 여간첩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이 자들이 붙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세월호를 가장 빨리 잊은 사람들에서 새민련 지도부를 뺀다는 것은 안 될 말이다.(물론 새민련의 일부 의원들은 달랐다.) 이들이 선거 막판에 불리한 판세를 뒤집기 위해 세월호 심판론을 꺼내들자, 전형적인 ‘영혼없는 리액션’으로 보였다.
순식간에 350만 명이 서명했을 정도로 세월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공감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세월호 문제 해결과 박근혜 심판’을 말하는 새민련 지도부를 보면서 감흥을 느끼긴 어려웠다.
사람들의 반응은 ‘유대균이 치킨 배달을 시켰냐 아니냐’는 기사를 볼 때처럼 무덤덤했다. 왜냐하면 김한길은 박근혜 눈물쇼에 감동한 극소수중에 한명이었고, 안철수는 공천파동 일으키기에 정신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새민련 지도부는 새누리와 타협해서 세월호 특별법에서 알맹이를 빼왔다. ‘수사권만 받고 기소권은 포기하자’, ‘수사권도 특검에게 넘기자’, ‘특검 추천권도 논의할 여지는 있다.’ 후퇴는 거듭됐다. 이 땡볕에 목숨 걸고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의 허락도 없이 말이다.
새민련의 이 태도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세월호 특별법은 이 나라 기득권 세력과 이윤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전례없는’ 법안이라는 점을 봐야 한다. 따라서 이 나라 기득권 세력과 이윤 체제의 일부인 세력이 이 문제에 진정성을 보이기는 쉽지 않다. 해운업 자본가들이나 해수부 마피아 등과 새민련의 연결고리는 이미 계속 드러나 왔다.
새누리는 역겨운 방식으로 이를 이용했다. 새누리가 ‘참여정부 때 정권 핵심이던 문재인을 증인으로 부르자’고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규제완화와 민영화, 정경유착 문제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당장 새민련이 지방정부를 꾸린 강원도에서는 속초의료원 폐쇄를 추진하고 있다. 이것이 새누리당 홍준표의 진주의료원 폐쇄와 무엇이 다른가.
물론 새누리와 새민련은 차이가 있다. 새누리는 노골적·일방적으로 이런 정책을 추진하는 반면, 새민련은 아닌 척하고 반대 시늉을 하면서 비슷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새누리가 우리 눈앞에 칼을 들이대는 강도라면, 새민련은 우리 뒤통수를 치는 사기꾼에 가깝다.
또 중요한 차이가 있다. 새누리는 재벌·대기업들에 굳건하게 기반해 기득권 우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반면, 새민련은 재벌·대기업들의 미온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두 당을 보면 마치 경험과 자원이 풍부한 대기업과 욕심은 많지만 서툰 자영업자의 경쟁을 보는 듯하다. 선거에서 특히 그렇다.
새누리는 갈수록 기업형 선거 전문 정당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번에 새누리는 박근혜 마켓팅 포기, 이준석과 김무성으로 간판 교체, 최경환노믹스 광고, ‘살려주세요’ 재탕 등 온갖 방법으로 우파 지지층을 끌어모았다. 반면 새민련은 손발이 안 맞는 아마추어 자영업자들의 우왕좌왕만 보여 줬다. 중도층은 고사하고 개혁지지 대중마저 이 당을 위해 이 더운 여름에 휴가 시간을 쪼개서 투표하러 갈 이유는 없어보였다.
그래서 새누리가 유권자 중 20~30% 정도의 우파만 잘 결집하면 계속 선거·의회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선거·의회가 굴러가는 메커니즘이다. 지배계급의 정당들이 서로 다투면서도 권력을 나눠먹는 메커니즘이다.
선거 전문 대기업과 아마추어 자영업자의 경쟁
이 속에서 선거 결과는 노동계급 대중의 진정한 의식과 정서를 반영하기 어렵다. 단지 그것을 매우 왜곡된 형태로 반영한다. 따라서 선거 결과는 그 사회의 계급세력균형을 바꾸기 보다는 현재의 세력균형을 뒤틀리게 반영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선거에서 우파가 패배하고 개혁적 후보가 의회에 진출하면 그들이 위로부터 개혁으로 계급역관계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보적 후보의 당선 자체가 사람들의 자신감을 높여서 정치지형을 유리하게 해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거 결과 자체는 그런 동력이 될 수 없다. 이미 선거 전에 세월호 특별법을 껍데기로 만든 새민련이 설사 15군데 모두 이겼다고 갑자기 달라졌을까? 실제 계급세력균형을 바꾸는 것은 우리 편이 얼마나 조직력과 투쟁의 자신감을 갖고 단결하느냐이다. 선거 결과는 그것의 왜곡된 반영이며, 아주 부분적으로만 반작용을 가한다.
많은 경험과 사례들이 이것을 보여 준다.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압승하고 민주노동당이 약진했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것은 계급투쟁의 점진적 하강이었다. 2008년에 이명박이 당선하고 총선에서도 우파가 압승했지만 그 이후 벌어진 것은 1백만 촛불 항쟁이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우파가 패배하고 민주당이 부활했지만, 그 이후에 계급투쟁은 계속 지지부진했다. 2012년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선거에서 큰 성과를 얻었지만 그 이후에 진보는 분열과 위기로 치달았다.
이 때문에 좌파는 선거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를 거는 것을 항상 경계해 왔다. 진보적 후보가 당선되는 것 자체를 우선하기 보다는, 진보적 후보가 출마해서 어떤 주장을 하고, 무엇을 대표하고, 이후에 어떤 방향을 추진하는 지를 더 중시했다.
좌파는 진보 후보가 설사 적은 표를 얻고 낙선할지라도 노동자들의 요구와 목소리를 올곧게 대변하고, 진보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지난 지방선거와 이번 재보선 결과를 보고 많은 활동가들이 낙담한 주된 이유도 이것이 잘 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보지 못하고 ‘새누리가 이긴 게 아니다’라는 점만 강조했지만 말이다.
사실 한심한 새민련의 몰락은 진짜 근심거리가 될 수 없었다. 비록 우파가 반사이익을 얻는 게 재수 없지만 말이다. 당선한 진보 후보 수가 적은 것도 진정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척박한 땅에서 당장 당선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득표를 하고 끈질기게 나무를 키워 열매를 맺는다는 관점이 있다면 말이다.
그 점에서 노회찬 후보의 득표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노 후보는 대선주자급이라는 나경원과 거의 맞먹는 득표를 했고, X파일 폭로로 빼앗긴 자리를 되찾을 뻔했다. 한심한 새민련이 아니라 진보 후보가 더 제대로 우파에 맞설 수 있다는 점도 보여 줬다. 새민련이 이미 망친 판에서 노회찬의 당선을 낙관했다면 그것은 과한 기대였을 것이다.
하지만 노회찬 후보의 선방에도 진보진영 내에서 함께 기뻐하는 목소리가 작은 것은 왜 일까? 그것은 바로 이번 선거에서 노회찬 후보가 진보가 끌려가고 있는 불길한 방향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지금 두 가지 우려스러운 경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소멸하고 부르주아 양당체제로 나아가려는 경향이다. 노동자 도시라는 울산에서 진보가 후보도 내지 못하고 결국 새누리가 당선한 것을 보라.
또 하나는 진보가 정치적 독립성을 잃고 갈수록 부르주아 야당에 끌려가는 경향이다. 정의당 천호선 대표는 이번 재보선에서 “정의당이 있는 곳에서는 정의당을, 정의당이 없는 곳에서는 새정치연합을 선택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
정의당은 현재, 이 두 가지 잘못된 경향을 가장 분명하게 따라가고 있다. 정의당 자체가 진보정당이면서도 ‘친노’와 연합한 정당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향이 문제인 진정한 이유는 선거보다, 이것이 투쟁에서 미치는 악영향 때문이다.(선거에서는 경우에 따라 득일 수 있다.)
당장 정의당은 세월호 국정조사에서 새민련과 별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새민련이 우파와 타협해 특별법을 누더기로 만들자, 그것을 비판하기보다 “다행”이라며 환영했다. 정의당이 결국 새민련 왼쪽방으로 들어갈지 모른다는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려스러운 두 가지 경향을 막아야
노회찬 후보도 이번에 진보의 단결이 아니라 분열을 더 키웠다. 노 후보는 처음부터 새민련과 단일화만 추구했고, 나중에는 김종철 후보와의 단일화를 꺼렸다. ‘진보당과 손잡은 김종철과 단일화하면 간접적 종북연대’라는 압력 때문이었다. 3개 진보정당이 단일화를 성사시키고, 이에 입각해 새민련의 사퇴를 압박했다면 최상이었겠지만 그것은 생각도 않는 듯 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노회찬 후보가 당선되고, 이후에 새민련과 통합하고, 그 통합세력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왔다. 진보진영 일부에서 노회찬 후보를 혼쾌히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선거가 끝나고 나서는 감정의 골이 더 깊어졌다.
이런 상황 때문에 정의당 노회찬 후보, 진보당 장원섭·윤경선·이성수 후보, 쌍용차 김득중 후보 등이 각각 적지않은 득표를 했음에도 진보진영의 분위기는 갈수록 갑갑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단지 선거 당선과 의회 입지만을 고려하는 단기적인 선거공학이 아니라, 전체적인 계급투쟁을 어떻게 전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계급투쟁의 대수학이다.
이 점에서 김득중 후보와 김종철 후보의 도전은 의미가 있었다. 두 후보 모두 선거공학적 계산으로는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김득중 후보는 무엇보다 4개 진보정당을 하나로 묶어세우며 단결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쌍용차의 친사측 노조도 김득중 후보를 지지했다. 그래서 5년만에 공장 안에 들어가서 라인을 돌며 동료들과 포옹할 수 있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끔직했던 대립을 돌아보면 이것이 쌍용차 해고자 복직 투쟁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진전인지 알 수 있다.
세월호 문제와 각종 노동·민주주의 쟁점에서 가장 일관되게 좌파적 목소리를 대변한 것도 김득중, 김종철 후보였다.(진보당 후보들은 세월호 문제에서 가장 열심이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번 재보선에서 세월호의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 의료민영화 반대 목소리, 밑바닥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김득중 후보도 마찬가지이지만, 김종철 후보는 특히 새누리만이 아니라 새민련도 진보의 “극복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유선희 후보와 단일화를 통해서 종북몰이가 낳은 ‘진보당 왕따’ 분위기에도 파열구를 냈다. 김종철 후보는 “만약 노 후보가 진보진영 재편 관련해 큰 그림을 제시해서, 그것이 완주 가치보다 큰 의미가 있다면 받아들일 것”이라며 끝까지 진보 단결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다시 강조하건데, 진보의 분열이 문제인 것은 그것이 선거에서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 아니다.(사실 선거에서 종북공세를 피하자는 계산은 현실적이다.) 그것이 노동운동의 단결과 투쟁에 끼치는 해악이 진정한 문제다.
진보의 분열과 위기 속에서 세월호같은 명백한 문제에서도 강력한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새민련에 끌려다니는 게 현재 상황이다. 내란음모 사건에 검찰이 20년형을 구형해도, 바다건너 미국 민주당 의원조차 항의하지만 바로 옆의 진보정당들은 침묵하고 있다. 우리를 정말 안타깝게 하는 것은 재보선 결과보다는 바로 이런 계급투쟁의 상황이다.
물론 박근혜는 지금도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고, 얼마든지 다시 위기를 겪을 것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새누리 내부에서 친박과 비박의 갈등 요소도 심어 놨다. 새민련은 앞으로도 이런 박근혜 위기의 수혜자가 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분열과 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진보는 박근혜의 위기를 투쟁의 기회로 이용하거나 새민련의 왼쪽 공백을 차지하기가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진보의 일부는 새민련으로 흡수되고, 새민련은 우파에 굴복하고, 박근혜는 위기를 벗어나는 일이 거듭될 수 있다.
세월호유가족대책위의 유경근 대변인은 “혼자 울면 눈물 한 방울이지만 함께 울면 거대한 강물입니다”라고 했다. 세월호를 보며 타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던 진보·노동운동 진영의 각 세력이 공동의 요구와 목적을 중심으로 강력한 단결과 투쟁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저들을 삼켜버릴 거대한 강물을 만드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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