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은 틀렸다!

[기고] 포스트모던 시대 진보언론과 민중운동

20세기 초에 레닌은 말했다. 신문은 정치적 선전가요, 선동가이자, 조직가라고. 전국적 정치신문은 당건설의 무기라고. 신문이나 언론의 본질이야 바뀌지 않았겠지만, 레닌의 시대와 지금은 하늘과 땅 차이 이상으로 미디어 환경이 바뀌었다. 물론 정치과 운동도 바뀌었다.

그런데 진보와 좌파를 자처하는 운동이나 언론은 여전히 20세기의 틀에 갇혀 있다. 몇 달 전 금속노조 삼성서비스지회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운동과 조직이 그 기초부터 얼마나 망가져 있고 또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그 사실에 대해 둔감한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금속노조 사태의 본질

올해 5월 삼성전자서비스 사측의 위장도급과 노조탄압에 죽음으로 저항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금속노조와 사측은 교섭을 했지만, 40여개가 넘는 각 지역 삼성서비스센터 바지사장들은 경총에 교섭권을 위임했다. 그런데 이 교섭은 금속노조 측도 인정한 것처럼,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내용이 오고 가는지 모르는 ‘블라인드 교섭’이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청문회 쇼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마저 민망한 블라인드 교섭에 대한 기사는 기자의 정당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매도하는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어떤 활동가는 ‘삼성매파의 역공작’이란 유언비어를 날조했고, 교섭당사자들에겐 ‘교섭을 휘청휘청이게 했다’는 과분한 찬사를 들었다. 기사를 실은 독립언론은 ‘쓰레기 언론’이란, 조중동과 같은 반열의 진보언론사상 최고의 훈장까지 받아야 했다.

한마디로, 삼성 자본과의 협상을 둘러싼 갖은 잡음(?)은 과연 금속노조가 무노조 삼성제국에 맞서 싸울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모두가 배제된 밀실협상 속에서 당사자인 서비스지회 노동자들은 들러리였고, 이를 지적한 인터넷 독립언론은 금속노조의 공적이 됐다. 왜 그랬을까? 많은 의문이 제기되지만, 결국 삼성이 문제라는 결론 이외는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다.

삼성이란 거대한 공룡 앞에서 과정상 무슨 문제가 있든 단협만 얻어내면 성과라는 관료적 발상 속에서 운동의 원칙은 간단히 실종됐다. 껍데기만 남은 산별인 금속노조는 제도정치나 재계의 반민주적 관행을 내면화해서 아무 문제의식 없이 밀실협상, 보도통제, 철통보안 등 구시대적 관행을 조합원과 대중들에게 들이밀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언론통제인가?

조중동을 공적으로 입에 달고 살지만, 아쉬울 때 제도언론, 주류언론에 의지하는 운동 관료들의 편의주의적 행태는 정파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되풀이되고 있다. 투쟁보다 언론플레이를 주업무로 삼는 관료주의는 자신의 선전수단은 내팽개친 채 제도언론에 의존하고, 그 결과 이른바 진보언론은 위계적 서열의 주변에 위치한 찬밥신세다.

협상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기자에 대한 금속노조 일부 실무자들의 왕따놀이(?)는 너무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그러나 기사 때문에 협상팀이 해고될 뻔하고 협상이 흔들렸다는 악의적 중상비방의 결과 얻어낸 것이 무엇인가? 후퇴한 타결안, 그 마저 지키지 않는 삼성 자본 앞에 조합원들은 여전히 고통 받고 있고, 협상 당사자들은 침묵으로 외면하고 있다.

이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사실을 보도하고 금속노조를 정당하게 비판한 기자와 내막도 모르고 지도부를 신뢰한 조합원들이었다. 금속노조 측은 사실관계는 밝히지 않은 채 ‘보도기사가 교섭에 직접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미디어충청에 대한 취재거부를 공식단위에서 결정한 내용이 없다’는 두 줄짜리 공문으로 사실상 사태를 봉합했다. 파행과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사실관계 날조와 악의적 비난에 대한 진상조사와 해명 요구는 묵살되고, 역사적 중대성을 갖는 이번 투쟁에 대한 평가는 실종됐다. 이것이 전투적 금속노동자들을 대표한다는 대산별 금속노조 투쟁의 현주소였다.

운동과 미디어

미디어는 권력과 자본의 통제수단이지만, 동시에 운동진영에겐 유력한 투쟁수단이기도 하다. 권력과 막강한 자본력 앞에 독립언론, 진보언론의 힘은 오직 진리와 기자/활동가들의 헌신뿐이다. 운동이 확대, 발전하면서 특정 조직의 기관지가 아닌 독립언론이 생겼고, 이는 운동의 반영이다.

역사적으로 운동의 발전과 전투성에 비해 한국운동의 선전활동은 어느 시점 중지했다. 민주노동당과 그 후예 합법정당들은 국회의원 배지에 목숨을 걸었지, 제대로 된 기관지를 대중들에게 제시하지 못했다. 또 얼마 전 민주노총의 <노동과 세계>가 인터넷판으로 변신(?)한 것은 이 매체가 총연맹의 기관지로서 남한 노동자계급 전체를 대변하긴커녕, 조합원들도 제대로 안 읽는 후진 신문으로 전락했음을 보여준다. 정파의 기관지로부터 출발해 대중적 신문으로 성장한 프랑스 공산당의 <위마니테>나 신좌파의 <리베라시옹>의 사례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운동의 확산과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자기 대중조차 대변하지 못한 기관지와 선전활동은 사실상 도태된 채, 관료적 조직형식에 갇혀 독립언론, 대안언론의 풀과 자양분을 마련했다. 이것은 비극이고, 대안언론의 등장은 작은 위안이다.

독립적 대안언론은 특정 단체나 노조의 나팔수가 아니다. 운동과 조직이 자기비판을 통해 변화하고 발전하듯이, 진보적 언론운동 역시 끊임없는 자기비판과 혁신을 통해 발전해야 한다. 운동과 단체의 수동적 대변인이나 전달벨트에 머문다면 대중의 신뢰를 획득하긴커녕 자기들만의 서클 활동으로 전락하게 된다. 진보적 독립언론은 운동과 긴밀하게 결합하되 비적대적 긴장 속에서 말 그대로 독립성을 견지하면서, 고유의 헌신성과 전문성을 통해 운동에 기여해야 한다. 운동의 관성과 오류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냉정한 성찰을 결여한 언론은 운동성을 탈각한 직업이나 아나키적 개인의 호사스런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게 된다.

정파와 배타주의

금속노조 사태 당시 비밀주의에 영합한 일부 활동가들(?)의 광기 역시 우려스럽다. 근거도 없이 삼성매파 운운하는 작태는 폐쇄적 정파활동의 대표적 폐해다. 입으로는 관료주의를 비난하지만, 실제로는 개인적 인맥과 정파적 관계망 속에서 운동을 진단하고 규정하는 종파주의의 멘탈에서 나오는 자멸적 망상은 오히려 저질 코미디에 가깝다.

그러나 악질적 저질 코미디의 주인공은 셀프 징계로 책임을 회피하고 그 자가 속한 단체는 엄격한 징계와 냉정한 자기비판은 외면한 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면서 문제를 봉합하기에 급급했다. 형식상 징계는 있었지만, 과정과 내용은 철저히 비공개였다. 이 행태가 과연 운동인가? 아니면 고도(?)의 유치찬란한 패거리 정치인가?

역설적으로 정파의 폐해를 지목한 것은 모두 정파소속 활동가들이었다. 정파에 소속되지 않은 무소속 활동가들이 정파의 폐해를 주장하지 않았다. 정파나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은 약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파의 최대 수혜자들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되풀이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연출된다.

운동 자체가 다양하고 내부 차이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 존재가 패거리 정치나 종파적 멘탈로 조직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정파의 존재는 당연하고 오히려 조직을 내용적으로 풍부하게 만드는 기제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조직내 민주주의와 의견의 자유를 묵살한 20세기 좌파운동의 자멸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 정파는 열린 정파여야 한다. 그 개방성이 폐쇄성으로 변질되는 순간 정파는 더 이상 존재이유가 없고 종파로 전락한다.

테크놀로지: 소통인가 배제인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IT 강국의 노동운동답게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기민하게 적응하지만 기술적으로 그럴 뿐이다. 다양한 새로운 매체들이 조직의 소통과 민주주의를 확장시킬 잠재력을 가졌지만, 소통방식만 번거롭게 만들었을 뿐, 조직내 민주주의를 확장하지도 소통을 심화시키지도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소통의 수단인 카카오톡은 타자와 ‘우리’(?)를 가르는 경계이자 타자를 배제하는 특권이 되고, 공적 관계 뒤에 숨어 그들만의 정보교환과 뒷담화를 즐기는 가학적 놀이터로 전락했다. 스마트폰의 앱을 사적인 용도로 이용하고 그로부터 사생활의 보호를 주장하는 것이야 당연한 권리이자 주장이지만, 운동과 조직의 카톡은 활동상 필요에 의한 공적 공간이며, 외부와의 경계는 지극히 상대적이고 제한적이어야 한다.

비공개 카톡에서 사실을 날조하고 악의적인 비난을 가하면서 사적인 의견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필요상 비공개일 뿐, 엄연히 공적 공간이며, 그 존재이유는 정보와 의견의 신속하고 자유로운 교환이다. 대화방에 소속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일말의 배려도 없이 정보와 의견의 일방적 과잉 공급으로 민폐를 끼치는 만행은 공적 공간에 대한 인식부족 때문이며, 일종의 사이버 테러다. 공사 구별 없이 사유화되는 카톡과 페북은 소통과 상호작용의 수단이긴커녕 사이버 공해이자 운동의 폐악이다.

에피고넨의 시대의 민중언론

헤겔이 사망하고 맑스가 등장하기 전의 백가쟁명의 시기를 에피고넨(난장이들)의 시대라고 한다. 현재 민주노조운동 역시 위기 속에서 에피고넨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세칭 금속노조사태는 운동의 원칙이 심히 훼손되고 고만고만한 자칭 지도자들이 서로 자리를 나눠먹는 에피고넨의 시대에 빈번히 등장하는 아주 전형적 사례이다.

현재 민주노총 새 집행부를 선출하기 위한 직선제 선거가 준비되고 있다. 에피고넨의 시대에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도 예외가 없다. 현재로선 어떤 집행부라도 구조적 위기로부터 벗어날 대안과 전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진정성에 대한 수사가 난무하더라도 위기에 대한 냉정한 진단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파에 소속돼 많은 혜택을 누린 자들이 정파를 비난하는 데 어떻게 제대로 된 분석이 나올 것이며, 분석이 부실한데 어떻게 대안과 전략이 나오겠는가?

운동의 대의와 원칙보다는 활동가 개개인의 이해와 정당을 포함한 정파적 이해가 지배적인 상태에서 운동은 필연적으로 정체하거나 퇴보한다. 독립적 진보언론은 운동 전체의 비판적 대변자가 되어 소외된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계급적 사다리의 맨 아래 기층의 투쟁과 목소리를 담아내야 한다. 또한 동시에 알량한 특권에 연연치 말고 운동 자체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성찰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것이 에피고넨의 시대 진보적 운동언론의 사명이다.

레닌은 틀렸다. 아니다. 맞고 틀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변화된 환경에서 원래의 문제의식을 재인식하고 진일보시켜야 한다. 그것이 핵심이다. 하이테크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매체 환경 속에서, 언론의 역할은 더더욱 중요해졌다. 20세기 좌파운동의 실패가 보여주듯이, 소통과 민주주의의 우회로는 없다. 레닌의 말대로, 진보언론도 학습하고, 선전하고, 조직해야 한다. 국가권력과 자본에 맞선 투쟁 속에서 매체의 확장만이 아니라 본질의 회복과 심화를 통해 미디어가 운동의 무기가 될 수 있을 때, 미래와 대안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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